[이 아침의 시] 울타리 밖 / 박용래

서대선 | 기사입력 2021/02/22 [08:27]

[이 아침의 시] 울타리 밖 / 박용래

서대선 | 입력 : 2021/02/22 [08:27]

울타리 밖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 소녀와

한 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런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 “울타리 밖” 삶에 대한 목마름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때, 계절은 직장의 스케줄에 엮여 있었다. 이월 말 추위를 뚫고 솟아오른 파란 보리 싹들을 만나는 대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 대처하는 전략회의와 고된 입시를 뚫고 교정에 돋아난 파릇한 신입생들을 만났다. 삼월의 아지랑이가 “사랑스런 들길”을 아른거리며 종달새 노래에 실려 봄 하늘로 날아오르는 동안, 학생들의 활기찬 소리가 종달새 노래를 대신했고 강의와 과제와 상담 속에서 봄날들은 붐볐다. 사월 중간 평가 시간, 창 너머로 보이는 목련꽃 흰 구름 속에서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는 아득하기도 했었다. 교정의 영산홍 붉은 함성 속에 오월 축제가 지나가고, 아카시아 꽃향기 아련한 시간, 학생들도 자신의 향기를 만들어 갈 즈음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직장이란 울타리 안에서도 계절은 오고 근사한 길들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울타리 밖” 길들에 목이 말랐다.

 

사회적 자아를 빙벽처럼 두르고 송곳 위를 걷는 듯했던 타인의 시간들을 청산하고, 모든 시간을 스스로 계획하고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둔덕을 거닐다 바람 속에 고물거리는 아주 작은 양지꽃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살얼음 가득했던 마음속으로 “울타리 밖”을 흘러가던 물길이 흘러들었다. 전신을 두르고 있던 빙하가 허물어지는 소리에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아 오래 양지꽃을 바라보았다. 타인의 시간과 타인의 시선을 훌훌 벗어버리고 온전히 자신과 자연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잊고 산 것은 아니었다. 목표지향적인 삶 속에서 아지랑이가 피고, 제비가 날고, 길을 따라 물이 흐르던 “울타리 밖”은 마음속 깊이깊이 묻어버리고, 생활이 요구하는 시간, 조직이 계획한 시간을 살아내느라 늘 목이 말랐고, 마음은 추운 흙 속에 묻혔던 씨앗처럼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는 것이지만, 봄을 봄답게 맞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경쟁과 콘크리트 안의 삶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일상의 “울타리 밖”에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떠나 온 지 오래된 그 마을엔 “낯이 설어도 사랑스런 들길이 있”고,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그렇게//천연히”,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팍팍한 울타리 안의 시간들을 견딜 수 있으리라.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