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문득 / 이희주

서대선 | 기사입력 2024/01/22 [08:44]

[이 아침의 시] 문득 / 이희주

서대선 | 입력 : 2024/01/22 [08:44]

문득

 

콩나물에 물을 주다가 문득, 비좁고 캄캄한 시루 속에서 안

간힘으로 부대끼며 어떻게든 고개 들고 살아가는 콩나물들을

내려다본다

 

콩나물에 물을 주다가 문득, 아스파라긴산을 몸에 품고 서

민들 밥상의 무침이 되거나 속 쓰린 사람들의 해장국이 될 그

들의 헌신에 대해 생각한다

 

콩나물에 물을 주다가 문득, 산다는 것이 꼭 치열해야 하는

것인지 누군가를 위해 헌신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 세상 시루

속 지치고 쓸쓸한 당신을 들여다본다

 

# ‘내가 그랬나?’ 장을 보러 가면 늘 콩나물을 샀다며 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던 어린 딸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오늘도 장바구니에 콩나물을 담으며 메타 인지(metacognition)를 작동시켜본다. 오래된 기억들을 불러내어 차근차근 헤아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콩나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콩나물은 친구들과 밤새 담소를 즐기던 남편의 숙취 해소를 위해 끓이던 술국이었거나, 감기나 몸살 기운이 있을 때 끓였었다. 그런데도 장을 볼 때마다 콩나물을 샀던 행동은 유년의 기억 속을 들여다보게 했다.  

 

부엌 옆에 딸린 방은 주로 어머니께서 드나들던 살림방이었다. 첫눈이 올 무렵부터 다음 해 냉이국을 끓이기 전까지, 어머니는 그 살림방에서 콩나물을 키웠다. 아마도 겨울이면 싱싱한 야채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대비하였던 음식 재료였을 것이다. 그 방에는 검은 보자기를 곱게 덮어쓴 콩나물시루가 있었다. 시루 밑에는 소년 팔뚝만한 두께의 나무 기둥 두 개가 콩나물시루를 떠받치고 있었고, 그 밑에 커다란 자배기 속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렸다. 흰 무명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는 콩나물시루를 덮었던 검은 보자기를 젖히고, 오른손으로 자배기 속의 물을 한 바가지 퍼 올린 다음, 콩나물시루 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콩 위로 왼손을 쫘악 폈다. 펼친 왼 손가락 사이로 오른손으로 퍼 올린 바가지 속 물을 천천히 뿌려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조왕신인 어머니가 콩 위로 내리는 물세례처럼 보였다. 몇 차례 콩들 위로 물세례가 끝나면, 어머니는 다시 검정 보자기로 콩나물시루 가장자리까지 꼭꼭 여미어 닫아주었다. 콩들은 어머니의 물세례를 받으며 어떤 꿈을 꾸었을까? 

 

콩나물과 함께 떠오른 기억은 밥 한 그릇이다. 어머니는 늘 식구 수보다 한 그릇 정도의 밥을 더 많이 지으셨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 따로 떠놓은 밥 한 그릇은 따스한 아랫목에 예쁘게 수놓은 조그만 덮게 이불 속에 묻혀 지냈다. 그 밥은 누가 먹을까 궁금했는데, 얼마 후 영하의 늦은 저녁 먼 시골에서 연락도 없이 친척 아저씨께서 들렸다. 어머니는 얼른 콩나물 한 줌을 뽑아 새우젓국에 팔팔 끓이고는 달걀 한 알을 풀었다. 김장김치를 썰고, 마른반찬 몇 가지로 상차림을 하고는 아랫목에 있던 밥주발을 꺼내어 친척 아저씨 앞에 밥상을 차려 드렸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아이가 열이 나고 아프다며 병원비를 구하러 들렸던 동네 아주머니에게 콩나물과 아랫목에 있던 밥주발을 싼 보자기 속에 병원비를 넣어 건네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날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젊은 날, 문학의 길을 가는 남편이 모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시의 도반들과 술이 거나한 채, 자정 무렵 예고도 없이 아기 동자의 표정으로  대문을 들어섰던 날들의 문인들 숙취 해소를 위해 나도 콩나물국을 끓이곤 했다.

 

“아스파라긴산을 몸에 품고 서/민들 밥상의 무침이 되거나 속 쓰린 사람들의 해장국이 될” 콩나물을 바라보던 시인은 한 걸음 더 나가 자신의 메타 인지를 작동시킨다. “콩나물에 물을 주다가 문득, 산다는 것이 꼭 치열해야 하는/것인지 누군가를 위해 헌신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 세상 시루/속 지치고 쓸쓸한 당신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마음이 우리를 각성시킨다. 콩나물이 될 콩들은 다음 해 봄을 맞을 수 없고, 빛나는 태양과 산들바람과 새들의 노래와 연두의 푸르름과 폭우와 가뭄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꽃을 피워 벌과 나비와 곤충들을 만나 후손을 만들 수도 없다. 오로지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잠깐의 생으로 인간들의 식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 세상에서 보석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수천만 서민들의 곁에서 쓰린 속을 달래주고, 으슬으슬한 세상의 한기를 녹여주고, 누구라도 손쉽게 손을 내밀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서민의 먹거리인 “콩나물”.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귀한 줄도 모르는 생명의 희생과 헌신이 있기에 우리의 고단한 삶이 조금은 따스해지는 것이리라.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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