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고독의 얼굴 / 구석본

서대선 | 기사입력 2024/04/22 [13:52]

[이 아침의 시] 고독의 얼굴 / 구석본

서대선 | 입력 : 2024/04/22 [13:52]

고독의 얼굴

 

내가 나를 증명하려면 이력서를 내야 했다

그대 정면에서 보여주는 무기력한 표정,

고양이의 몸짓, 각질이 된 분노,

진면목(眞面目)으로도

‘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

 

이제 이력서의 나를 지우는 시간,

비로소 내가 보인다

아침이면 머문 자리를 지워서

허공이 되는 달과 별,

노을 너머 제 홀로 깊어 가는 어둠,

오오, 저무는 삼라만상의 맑고 푸른 그늘이

우주의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처음의 진면목이 안에서 떠오른다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빛처럼

뼈대만 남은 나의 얼굴이 보인다

고독의 자화상이

내 안의 백지에 서서히 그려진다.

 

# ‘얼굴이 이력이네.’ 만기 된 여권을 갱신하려 새로 찍은 사진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굴 주름과 표정 속에는 하류에 쌓인 모래톱 위를 스쳐 가던 시간의 잔물결처럼 삶의 무늬가 스며있었다. 이참에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의 얼굴도 갱신했다. 오랫동안 나를 증명했던 과거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친숙한듯하면서도 조금 낯설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자기소개’를 해야만 하는 순간들을 만난다. 이름, 얼굴, 주소, 학력, 가족 구성 등,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명함 등에 담긴 내용이 나를 가리키는 지표로 쓰였다. 미국 에모리대 뇌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그레고리 번스(Gregory S. Berns)는 묻는다. ‘그게 정말 나일까?’ 타인에게 나를 소개하며 가장 먼저 꺼내는 나의 ‘이름’은 단지 라벨(labal), 즉, 타인이 붙인 꼬리표일 뿐이건만 그걸로 나를 소개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누구’를 단수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스는 인간은 3가지 다른 버전의 ‘나’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는 ‘현재의 나’가 있다면, 그동안 살아온 행적을 담은 ‘과거의 나’가 존재하고, 과거와 현재의 조각을 이어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 서사구조로 빚어지는 ‘미래의 나’가 있다고 보았다. 즉, 하나의 몸 안에 세 개의 자아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인간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주체는 나의 어느 부분일까? 바로 ‘나의 뇌’다. 20여 년 동안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을 활용해 뇌의 의사결정 메커니즘과 보상 반응을 연구한 번스는 ‘자아는 수많은 사건 중에서 특정한 부분을 편집하고 맥락을 이어붙인 기억의 집합’이라고 정의했다. 

 

나를 소개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편집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를 연결하기 위한 인지기술을 발전시켰는데, 그 결과물이 이야기다. 뇌가 빚어낸 서사구조를 갖춘 좋은 이야기야말로 ‘나’를 설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뇌는 우리가 겪은 수많은 경험으로 점철된 삶의 기억을 인식하고, 압축시키고, 예측하고, 해리하는 과정을 통해 생성된 이야기를 엮어 서사를 만들고, 자신만의 자아정체성(ego identity)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나는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라고 전언하였다. 

 

“내가 나를 증명하려면 이력서를 내야 했”던 시간을 들여다보던 시인은 그 “이력서” 속에 드러난 “정면에서 보여주는 무기력한 표정,/고양이의 몸짓, 각질이 된 분노,/진면목(眞面目)으로도/‘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몸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자아는 매우 불안정하며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나라는 착각’은 뇌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한 시인은 “이제 이력서의 나를 지우는 시간,/비로소 내가 보인다/아침이면 머문 자리를 지워서/허공이 되는 달과 별,/노을 너머 제 홀로 깊어 가는 어둠,/오오, 저무는 삼라만상의 맑고 푸른 그늘이/우주의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고 전언한다.

 

사회적 인간관계 속에서 만들어졌던 이력서 속의 내가 허구이며, 망상이었다는 것을 의식하고 인정하게 되는 순간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빛처럼/뼈대만 남은 나의 얼굴”의 “진면목”을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에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뇌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총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고전을 통해 과거를 만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현재를 읽고, 보고, 들으며, 행동하는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구조를 구성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활용해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기억과 새롭게 구성된 현재의 이야기를 통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때, “내 안의 백지” 위에 새로운 나의 모습을 재창조할 수 있으리라.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