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봄 언덕엔 언제나 / 이건청

서대선 | 기사입력 2024/03/04 [05:53]

[이 아침의 시] 봄 언덕엔 언제나 / 이건청

서대선 | 입력 : 2024/03/04 [05:53]

봄 언덕엔 언제나

 

봄 언덕엔 언제나 네가 있었다.

네가 아른아른 피어오를 때마다

지평선이 흔들려 보였다.

풀빛 푸르러 오는 언덕에서

한나절 서성이는 너를

바라다보면

문득, 벼랑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곤 하였다.

겨우내 얼었던 가슴

봄볕에 풀려

무너져 내리는 소릴 듣곤 하였다.

 

봄 언덕엔 언제나 네가 있었다.

지평선 쪽에서 아련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며 눈을 비비는 노 시인과 아우내 장터를 걸었다. 어린 소녀였던 유관순의 발자국이 찍혀있던 장터 골목마다 마음을 얹어 보았다. 시대의 앞날을 걱정했던 부모님과 선교사에게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지와 평등사상을 배웠던 어린 유관순이 걸었던 아우내 장터를 따라 걸으며, 2024년 삼월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환한 봄 햇살은 따스하고, 파란 하늘엔 뭉게구름 몇 점 떠가는 아우내 장터 순대국밥 식당에선 허기를 채운 사람들이 나오고, 사람들을 실은 버스가 와 닿고, 또 어디론가 사람들을 싣고 떠난다. 역사의 한 장을 품고 있는 아우내 장터의 한가로운 일상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아우내란 ‘2개의 내를 아우른다’는 뜻이다. 경상도와 한양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조선 시대부터 전국의 상인들이 청주, 진천, 조치원, 예산 등에서 지역특산물과 소를 몰고 와 장을 형성했던 크고도 번성했던 장터다. 전국 각지 사람들의 왕래와 교류가 빈번했던 지역이었으니, 그 당시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비교적 빠르게 알 수 있었던 곳이었으리라.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엔 매월 1일 6일장에 맞추어 모여든 사람들이 순대국밥 집에서 전국 곳곳의 소식을 나누었고, 다양한 상권이 형성되었던 아우내 장터였기에 만세시위의 날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다녔던 유관순은 서울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고향 천안 병천으로 내려와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조인원 등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열렸던 만세시위에서, 전날 밤 교회에서 밤새 만들었던 태극기를 나누어 주다가 잡혀갔던 유관순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위현장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던 가족들로 인해 유관순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념을 행동으로 산화시킨 유관순은 원자(原子)로 환원되어 세상의 모든 그녀가 되었다.

 

신념(信念)은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결정할까? 신념은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고, 일상의 평범한 선택부터 운명에 영향을 주는 깊고 무거운 결정까지 설계하는 ‘건축가’이다. 신념은 단독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가족, 친구, 사회집단 등, 공동체 신념의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형성된 신념은 자아의식과 연결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자신의 자아개념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도록 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신념은 축적된 우리의 경험과 문화적 교육과 함께 개인적 가치를 담은 인지적 스키마(schema)를 가진다. 신념은 우리가 세상을 효율적으로 탐색하는데 정신적 지름길 역할을 하며, 세상의 정보를 필터링하고 해석하고, 행동을 촉발시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봄 언덕엔 언제나 네가 있었다./네가 아른아른 피어오를 때마다/지평선이 흔들려 보였다./풀빛 푸르러 오는 언덕에서/한나절 서성이는 너를/바라다보면/문득, 벼랑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곤 하였”던 시인은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어린 소녀와 만세 소리가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아우내 장터에서 그녀의 생가가 있는 봄 언덕을 바라보았다. 태극기를 손에 든 그녀가 봄 언덕 바람 속에 연두의 이파리로 흔들렸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녀의 눈빛이 봄 햇살로 반짝이고, 몇 점 떠가는 뭉게구름 속에서 언뜻언뜻 날리는 그녀의 흰 옷고름이 보이기도 했다. 2024년 봄날, 평화롭고 한가한 아우내 장터의 일상을 뜨거워진 눈시울로 바라보는 노부부 앞에서 자박자박 걸어가는 18세 소녀 유관순의 낮은 숨소리를 듣는 봄날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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