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더덕 / 정병근

서대선 | 기사입력 2020/03/16 [08:17]

[이 아침의 시] 더덕 / 정병근

서대선 | 입력 : 2020/03/16 [08:17]

더덕

 

세운 무릎 바짝 껴안고 있다

무릎 위에 머리만 달랑 얹혔다

턱 밑이 무릎이다

무릎이 등을 바짝 업고 있다

전차가 끌고 온 바람이

할머니를 팔랑팔랑 넘긴다

더덕 냄새가

지하도 멀리까지 퍼진다

 

#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발걸음 분주한 지하철 통로, 바쁘게만 보이는 사람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곳에 "무릎이 등을 바짝 업고" 있는 할머니 앞에 할머니를 꼭 닮은 더덕이 포개져 있다. “무릎 위에 머리만 달랑 얹”혀 있는 할머니는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지하철 통로에서 더덕이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시 ‘사람을 쬐러’ 나왔다면 복지관이나 경로당이 더 나았을 텐데. 

    

정처(定處)를 떠나온 할머니 앞에 놓여 있는 더덕도 태어난 고향이 있었으리라. 봄비 개인 어느 햇살 가득하던 날, 말랑말랑 해진 흙 사이로 비쳐드는 빛을 따라 여린 떡잎을 흙 위로 내밀어 세상을 만났을 때의 시간이 있었으리라. 이파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바람의 촉감, 봄비 섞인 흙냄새, 무언가를 입에 물고 열심히 기어가는 개미들, 멀리 보이는 키 큰 나무 가지들의 멋진 자태, 나무 가지에 앉아 누군가를 부르는 작은 새의 지저귐, 새로운 시간들을 채워갈 두근거림과 약간의 현기증... 그 뿐이랴. 의지할 곳을 찾아 허공을 맴 돌며 지지대를 끌어안던 줄기의 시간, 벌도 나비도 곤충들도 기웃 거리던 꽃의 시간, 대견하기만 하던 열매의 시간들을 지나 그 모든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둔 뿌리의 지층은 한 켜 한 켜 마다 생의 향기를 품고 있으리라.      

 

지하철 통로를 지나던 시인은 할머니와 할머니 앞에 놓인 더덕에 시선을 멈추고 “전차가 끌고 온 바람이/할머니를 팔랑팔랑 넘”기듯 할머니의 전 생애가 형성했을 지층을 따라 간다. 할머니의 탄생의 순간, 아장 아장 걸으며 지구라는 행성을 탐색하던 시간, 속옷만 스쳐도 비명소리가 절로 터지던 젖몽울이 어린이에서 소녀로 이끌던 사춘기, 꽃 시절 꿈꾸던 ‘홈 스위트 홈’, 그리고 가슴 아린 사연의 시간들이 삶의 지층 마다 응축된 향기를 읽어낸다. 비록 지하철 통로에서 “세운 무릎 바짝 껴안고” 웅크리고 있는 할머니지만, 더덕처럼 향기로웠던 할머니의 시간들을 찾아낸 시인으로 해서 지하철 통로는 “지하도 멀리까지” 향기 가득해진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한 노인들도 향기 가득한 사연 하나씩은 품고 있으리라.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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