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신 영 | 기사입력 2009/01/06 [15:52]

아버지와 아들

신 영 | 입력 : 2009/01/06 [15:52]
▲ 미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장면     ©신영

아버지와 아들  
 
가끔은 가던 길 멈추고 걸어오던 발자국을 뒤돌아본다. 한 발자국씩 걸어왔던 지난날의 일들이 아련함으로 남을 만큼 멀어져 가는 발자국을 보면서 서 있는 자신을 또한 느껴보는 것이리라. 오래 전(1969년), 한 젊은 가장은 가족들(처와 자식)과 떨어져 머나먼 타국의 낯선 이민의 꿈을 꾸고 있었다.

1여 년의 시간을 혼자서 미국 땅에 발을 디디며 험한 일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모험을 시작한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철도공무원이 되어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뜨겁게 끓는 젊은 청년의 피 속에는 자식을 셋이나 둔 아버지의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

교육제도에 대한 마음의 불만도 있었고 큰 곳에 가서 기지개를 크게 펴보고 싶은 삶의 욕심도 일었다. "그래, 그럼 한 번 삶의 큰 그림을 그려보는 거야!" 이렇게 마음을 먹고 초창기 이민자가 된 것이었다.
 
낯설고 서글픈 남의 나라에서의 생활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젊었으니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모두를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며 알뜰히 돈을 아껴 저축하였다. 드디어 가족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날이 찾아왔다. 1970년 가족들도 모두 이민 길에 오른 것이다.

어려운 이민 생활의 시작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있다는 큰 기쁨에 참을 용기가 생겼다. 어느 가정이나 생활은 비슷하겠지만, 큰아이에 대한 기대가 크고 높기만 했다. 학교에 세 아이를 입학시키고 큰아들이 4학년, 딸아이가 3학년 그리고 막내가 1학년에 입학을 하였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니 두 부부는 열심히 회사(공장)에서의 잡을 잡고 아이들을 돌보며 그렇게 생활을 했던 것이다. 학교에 잘 적응을 하는 것인지, 아이들은 별 불만 없이 제 공부와 집안일 거들기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 '태권도장'을 열었다. 운동을 좋아했던 터라 미국 아이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자라며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처음 이민 왔을 때, 큰아들은 영어를 모르면서도 화장실에 가 앉아있으면 늘 '단어공부'에 열중하리만큼 성실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아이였단다. 아이들 영어가 늘 걱정인지라 생각 끝에 선교사를 찾아 세 아이를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헌데, 딸아이와 막내아들은 하다 말고 그만 포기를 하는데, 큰아들만이 끝까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밤마다 잠들기 전 꼭 기도를 하고 잠을 청하는 신실한 믿음이 생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막냇동생이 늘 그 형에 대한 '믿음'을 얘기할 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잘 모르지만, 밤에 잠들기 전에 '기도하던 형의 모습'은 가히 믿음이 간다는 얘길 자랑스럽게 가끔 하는 것이다.
 
그 믿음이 지금은 장로 교회의 '장로 직분'을 맡게 했다. 신실한 마음과 청렴한 그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모습과 요즘 세상 아이들과 구별시키려 애를 쓰는 모습은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부끄럽게까지 한다. 그 흔하고도 흔한 핸드폰도 엊그제서야 사줄 정도니 그만하면 그 아버지를 알 듯싶다.

 아마도 할아버지(그의 아버지)에게서부터 시작된 절약정신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이민 초창기에 고생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깊은 마음과 한국 아이들이 하나도 없이 삼 남매가 나란히 백인들 틈에서 공부를 하며 당당히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을 만큼 밤을 새우며 노력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삼 남매가 고등학교에서도 동양인들은 셋밖에 없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한 탓에 백인들의 틈에서도 늘 상위권에 있었다고 한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으로 큰아들은 미공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했고 딸과 막내아들은 최고의 아이비리그 대학을 같은 학교에 해마다 나란히 입학을 한 것이었다.
 
초창기 이민자로 어려움은 물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희생했던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다. 처음 큰아들을 미공군사관학교(united states air force, the 美國空軍)에 입학시켜 놓고 가슴이 많이 아프셨다고 한다. 더 좋은 조건의 학교에서도 입학 허가서를 받았는데 두 동생이 연년생으로 있으니 부모님의 어려움을 알고 미공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한 큰 아들의 깊은 마음에 많이 우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눈물은 그저 마르지 않았음을 이제야 정말 또 느끼는 것이다. 그 눈물이 '맑은 열매'가 된 것이다. 2년 전 큰아들의 '미공군 대령식'이 있었단 날의 감동은 온 가족의 큰 기쁨으로 오래 남았다. 너무도 자랑스런 아들이며 '이민자(한국인)들의 자랑'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은 와싱턴 펜타곤에서 근무 중이다.
 
또한, 손자(큰아들의 둘째 아들)도 아들이 입학했던 미공군사관학교(united states air force, the 美國空軍)에 입학을 해서 지금은 3학년이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길을 걸어가는 길은 정말 멋진 일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초창기 이민자'로서의 그 개척정신과 절약과 끈기를 그대로 아버지를 통해 손자에게까지 이어 진 것이리라.

'한국인의 개척정신과 끈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이민 2세들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기도 한 것이다. 늘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들려준다.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초창기 이민 역사를 들려주곤 하는 것이다. 또한, 자랑스러운 큰아버지와 사촌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큰 꿈인지를 말해주곤 하는 것이다. '자랑스런 한국인'의 꿈을 펼쳐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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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저널21 신 영 /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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