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배의 바다이야기] 피카소가 추사 김정희를 그린다면

윤학배 | 기사입력 2024/01/01 [21:08]

[윤학배의 바다이야기] 피카소가 추사 김정희를 그린다면

윤학배 | 입력 : 2024/01/01 [21:08]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섬은 최적의 유배지였다. 서양에 빠삐용과 나폴레옹이 그랬고 만델라 대통령도 절해고도(絶海孤島) 섬으로 유배를 간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리 한반도로 눈을 돌리면 제주도와 경남 남해가 대표적인 유배지로 손꼽힌다. 오죽하면 남해에는 유배문학관이 있을 정도이다.

 

조선시대 명필이자 당대 최고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 1840년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추사처럼 외딴섬으로 유배 가는 자체가 재기용 가능성이 없는 경우로 임금의 부름만을 하염없는 기다리다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여기에 위리안치까지 더해지면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형이나 사약만 내리지 않았을 뿐 거기에서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더욱이 유배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말 그대로 임금이 풀어주어야 해배(解配)되는 것이어서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 유배생활이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지독한 당파 싸움에서 지게 되는 경우는 아예 재기를 하지 못하도록 싹을 자른다는 차원에서 유배를 보냈다. 특히 절해고도 유배는 가는 도중에 풍랑이나 병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하여 유배지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지금도 제주도나 추자도, 흑산도나 홍도 등으로 여행을 가려면 현대화된 대형 선박을 이용해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당시 돛이나 노를 저어서 가야만 하는 돛단배인 경우에는 오죽 했겠는가? 

 

추사의 위대함은 8년여의 제주 유배생활을 그냥 헛되이 불만이나 좌절을 한 것이 아니라 추사체를 완성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추사였지만 제주 유배를 거치면서 현재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명품 추사체를 완성하게 된다. 거기에다 조선시대 문인화의 진수라 일컫는 ‘세한도’를 그려서 제주 유배기간중 추사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준 제자이자 통역관이던 이상적에게 선물로 준 것은 추사의 인간미를 엿 보게 한다. ‘세상이 추워 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인 세한도는 그림의 단순함 속에서도 그 정신과 기개는 차갑지만 팔팔하게 살아 숨쉰다. 겨울 소나무의 날카로운 솔잎처럼 말이다.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러한 작품을 자기에게 도움을 준 아랫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마음의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바다를 닮은 추사의 따듯한 인간 됨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숙한 인간미는 유배이전 추사가 가졌던 것은 아니다. 유배이전 조정과 학문에서 잘 나갈 때의 추사는 매우 고집이 있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이었다고 하는데 제주 유배기간은 추사에게 문필과 예술에 있어서 무르익은 것 뿐 아니라 고민과 시련을 통해 인간적으로도 매우 성숙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배는 추사에게 시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련을 넘어 학문과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완성을 향해 가는 마지막 여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세한도가 보여 주듯이 말이다.

 

추사를 생각하면 불현 듯 20세기 최고의 미술 거장으로 꼽히는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가 떠오른다. 피카소는 “나는 이미 열다섯 살에 당시 최고 화가이던 벨라스케즈처럼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처럼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80년이 걸렸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거장다운 말이다. 그렇다! 외형상으로는 다소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완벽함이야말로 참된 완벽함이 아닐까 한다. 이는 인디언들의 목걸이나 페르시아의 양탄자와도 같다. 인디언들은 목걸이를 만들면서 반드시 흠이 있는 구슬을 하나씩 넣었다. 마찬가지로 완벽해 보이는 페르시아의 양탄자에도 보이지 않는 흠을 하나씩 일부러 남겼다. 완벽함은 신의 영역이라 보았다. 겸손할 줄 알았던 인디언이나 페르시아인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완벽한 이들이다. 

 

이는 추사체와도 같은 맥락이다. 추사는 당연히 해서.행서.초서의 달인이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해 보이고 어색해 보이는 전서나 예서와 같은 초기 금석문에 나오는 글자체의 글은 그 어떤 글보다 더 어려운 것이고 도의 단계에 들어가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추사체의 진가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서양의 피카소와 조선의 추사, 시대와 장소는 떨어져 있어도 많이 닮은 두 거장이다. 역시 거장은 통하는가 보다. 이 추운 겨울 제주 대정읍 추사 유배지에 가면 흩어지는 파도를 보며 고뇌하던 추사의 쓸쓸한 모습이 그려질 듯하다. 

 

불현듯 피카소가 추사의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그려 냈을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윤학배

1961년 북한강 지류인 소양강 댐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강원도 춘성군 동면의 산비탈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붓당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춘천 근교로 이사를 한 후 춘천고를 나와 한양대(행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986년 당시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바다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부의 부처개편에 따라 해양수산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다시 해양수산부에서 근무를 하였다. 2013년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2015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해양수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여의 바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공직 기간중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UN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와 영국 런던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6년여를 근무하는 기회를 통해 서양의 문화, 특히 유럽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애정, 열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호모 씨피엔스 Homo Seapien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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