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배의 바다야이기]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

윤학배 | 기사입력 2023/09/13 [11:06]

[윤학배의 바다야이기]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

윤학배 | 입력 : 2023/09/13 [11:06]

▲ 1588년 8월 7일 스페인 무적함대를 상대로 영국함대가 대포를 발사하는 모습 (BHC0263, © National Maritime Museum)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파도를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제압한다’는 말이 있고 근대에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역사적으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이 증명해 오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16세기 까지 세계 해양을 제패하며 세계를 호령하던 국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불멸의 무적함대로 불려던 아르마다(Armada 라는 말 자체가 스페인어로 해군 또는 함대를 의미한다) 함대가 영국에 패배한데 이어, 당시까지 스페인 합스부르그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가 독립하면서 뛰어난 조선기술과 행해기술로 17세기에 무역을 주도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1752-1774년 영란(英蘭)전쟁으로 불리는 3차례의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18세기에는 영국에 그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게 되고 이후 영국이 세계패권을 거머쥐게 된다. 19세기 빅토리아여왕시대의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은 그 명성과 영광을 결국 미국에 넘겨주게 된다. 미국도 근본적으로 영국을 대신한 해양대국인 것이다. 그러기에 미국의 세계 전략운용의 핵심수단은 항공모함 전단을 중심으로 한 해군 전력에 있다.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

 

18세기 세계 해양패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전쟁인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가 패하면서 당시까지 네덜란드의 북아메리카 진출의 교두보이자 식민지로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던 지역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는데 영국이 이곳을 뉴암스테르담 대신 뉴욕으로 부르게 된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북미에서의 모든 영토와 권리를 영국에 넘겨주고 철수하게 되고 만다. 현재 뉴욕에 근거지를 둔 야구팀 이름이 뉴욕 양키스이고 외국에서 반미 데모를 하면 ‘양키 고 홈’ 이라 하는 데 ‘양키( Yankee)’라는 말은 악명을 떨친 해적선장의 이름이라는 설과 당시 뉴암스텔담에 살던 네덜란드인들의 이름중 가장 흔한 것이 얀 Jan과 키스 Kees였기에 합쳐서 양키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하튼 근대의 역사적인 흐름을 보면 한 가지 명확한 것이 당시 바다를 누가 지배했느냐에 따라 제국의 명암과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세계 대양에 대한 제해권(制海權)은 바로 세계 패권을 향한 힘이자 영향력이었다. 이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물리적으로는 바로 항공모함 등 대형함정이고 이 해군함정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바로 국제법적으로 인정되는 공해상에 있어서의 ‘항해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와 영해에 있어서의 ‘무해 통항권’(right of innocent passage)이다. 그러기에 항해의 자유와 무해 통항권은 17세기 바다를 주름 잡았던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주창된 이래 강력한 해양강국들이 주장하고 옹호해 오는 국제법상 권리인 것이다. 당연히 현대에는 미국이 이 두 권리의 최대 수호자이고 반대로 중국이 남중국해 등 민감한 문제로 반대 입장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에 대하여 취하는 입장과는 달리 우리나 일본 등 인근 국가에 대하여는 오히려 이러한 항행의 자유를 만끽하려 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모순된 모습을 가진다. 

 

가장 전성기인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국가’라 불리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이후 일찍이 역사상 볼 수 없었던 최대 규모의 제국이었다. 20세기초 가장 절정기인 1차 세계대전 직전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영국은 당시 세계인구의 1/4인 4억 6천만 명의 인구와 세계 육지면적은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인 3,550만 km2를 지배하였으며 세계 군함의 절반이 영국 해군이었다. 당시 영국이 결정하면 그것이 곧 세계의 표준이 되었던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특히 해양에 있어서 영국은 세계 그 자체였다. 

 

윤학배

1961년 북한강 지류인 소양강 댐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강원도 춘성군 동면의 산비탈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붓당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춘천 근교로 이사를 한 후 춘천고를 나와 한양대(행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986년 당시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바다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부의 부처개편에 따라 해양수산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다시 해양수산부에서 근무를 하였다. 2013년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2015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해양수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여의 바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공직 기간중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UN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와 영국 런던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6년여를 근무하는 기회를 통해 서양의 문화, 특히 유럽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애정, 열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호모 씨피엔스 Homo Seapien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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