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라의 풍류가도] 두 개의 질문

홍사라 | 기사입력 2023/10/04 [14:40]

[홍사라의 풍류가도] 두 개의 질문

홍사라 | 입력 : 2023/10/04 [14:40]

  © 홍사라

 

다정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이 그랬다. 과거는 물리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에크하르트 톨레같은 세계의 저명한 철학자들과 구루들도 그랬다. 지금,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고. 그럼 나의 지금, 나의 오늘은 안녕한 걸까? 나는 지금을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렇게 매 순간 지금을 꼭 살아야 하는 걸까? 불과 한두 달 전의 나는 지금을 산다기보다는 몇 년도 더 전의 과거를 철저하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 매년 해오던 건강검진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잘 하지 않는다. 30대에 한 번 크게 아파 수술을 하고 난 이후로는 건강이 무척 신겨ᇰ쓰였기 때문이다. 몸에 좋지 않다는 식습관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고, 술자리도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줄였다. 운동이란 것도 아주 싫어하지만 걷기는 십 년이 넘게 꾸준히 하고 있으며, 정신건강을 위해 명상 같은 것도 한다. 바이오 관련 전공자이고 스트레스와 기능 의학으로 두 개의 석사를 가지고 있을 만큼 건강에는 스스로 전문가라 나름 자부하며 요즘같이 정보가 많고 건강기능식품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꼭 필요한 좋은 제품을 고를 줄 아는 눈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필요할 때면 보조식품을 먹기도 했다.

 

그런 내가 아프다니. 오랫동안 불편했던 위장관의 문제도 아니고 수술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니. 처음엔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니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그저 남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니 지금을 살기는커녕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 뭘 잘못했지, 이유가 뭐야…. 이런 생각들만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병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스트레스, 아니 요즘 세상에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도 있나? 그게 원인이라기에는 너무 모호했다. 무슨 이유가 있어야만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 싶었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당연히 생각은 과거를 흘렀고, 지나 날들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겐 매일매일의 오늘이 어제, 또는 그 옛날 어느 날에 머물러 있었다. 주변에서는 슬슬 걱정하기 시작했고, 그런 날들이 지나던 어느 날, 책장에 있던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NOW’. (정말이지 그때의 나에겐 현실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어의 제목이었다) 30대에 큰 수술을 겪고 나서 했었던 질문, 어느 정도 스스로 합의를 보고는 내려두었던 바로 그 질문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NOW는 그 질문에 답을 해보고자 읽어봤던 책 중 한 권이었다. 한번 거쳐 간 길이라 그때보다 담담하지만. 더 깊고 깊게 마주하게 되어버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과연 살아있는 동안 대답을 할 수는 있는 걸까 싶은 그런 질문. 내 인생 최대의 난제, 나의 두 가지 질문은 이렇다.

 

하나는 “도대체 왜 나에게?”이고 나머지 하나는 “왜 사는 걸까?”.

 

두 가지 질문 다 때때로 대답이 절실해지지만, 수학 공식처럼 딱 맞는 정답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속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대의 현자 중의 현자가 아닐까? 그런 사람이 존재는 할까?

 

먼저 ‘도대체 왜 나에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란 질문이 떠오르면 대답을 찾기보단 우선 화가 났던 것 같다. ‘아니 세상 다른 사람은 다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지?’란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니까. 그만큼 황당하고 충격적이고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종교가 없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종교가 있다면 이건 더 심각한 질문이 된다. 내가 믿는 신이 누구이든, 그 신이란 존재가 날 이런 곤경에 빠뜨렸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 신의 마음을 십분 이해해 비록 나에게 이런 일을 겪게 했지만, 다음에 상응하는 더 큰 복을 내리겠거니 하며 겸허히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태초부터 존재했다지만 직접 만난 적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 신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무교인 사람보다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나는 과학을 전공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문과적인 가슴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일을 판단할 때는 지독히도 이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을 배제하고 생각한다. 종교인이 아닌 이과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모든 것은 그냥 랜덤이다. 무슨 일이 누구에게 일어났든. 그 일은 그냥 거기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 일이 거기에서 일어나게 된 특별한 이유나 원인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이항분포그래프를 만들어내는 실험장치안에 들어있는 수십수백개의 쇠구슬처럼 그저 랜덤으로 어떤 곳에서 발현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더 억울해진다. 하고 많은 사람중에 아니 그러니까 그 랜덤이 하필 왜 나냐고. 신에게도 과학에게도 배신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하아. 그래도 첫 번째 질문은 양반이다.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면 대답은 더 어려워진다.

 

나를 몇 년을 괴롭혔던 바로 그 질문. ‘그럼 도대체 왜 살아야 할까?’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고 어느 순간이 되면 죽는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최재천 교수님의 말처럼 생명에 있어서 단 하나의 명확한 진리는 ‘모든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이 진리가 뒤바뀔 일은 없다. 수천 년에 걸쳐 영생을 살고자 돈과 권력이 있는 수많은 왕이 온갖 방법을 찾아 써보았지만 다 헛수고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증명된 셈이다.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고.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는 죽는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100세까지 산다고 해도 100세가 되면 죽는다. 죽음까지의 여정이 남들보다 길 수는 있어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삶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먼지보다도 작은 그저 흩날리는 티끌 같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못한 존재다. 나 스스로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존재라며 산다지만 커다란 세상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언젠가 지금의 이 생이 끝날 텐데, 그렇다면 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 하며 게다가 열심히 뭐라도 남겨보겠다며 매일을 노력하며 지금을 살아내야 하는걸까?’ 몇 년전 처음 이 질문을 마주했을 때 나는 이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매우 절망적이 되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수없이 많은 책을 읽어봐도, 여러 사람에게 물어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질문의 대답에 대해 오랜시간 고민해봤지만 나는 아직도 딱 떨어지는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정답에서 멀리 떨어진 언저리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뿐, 여전히 나는 답을 모른다.

 

그리고 얼마 전 또다시 수술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을 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하루를 살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과거를 살든 미래를 살든 어떻게든 하루 24시간을 살아가고는 있다. 

 

삶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많이 벗어나 시련이든 역경이든 그런 가지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가져다줄 때면 난 여전히 저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두 질문 모두 사는 것이 지치다 못해 버티기도 힘들어졌을 때,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에 가장 밑바닥이다 싶은 곳에서 만났게 되었던 질문이다. 저 질문이 스쳐 지나가면 다행이지만, 가끔은 마음에 자리를 틀고 터줏대감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피곤해진다. 왜? 답을 모르니까. 나 말고도 저 질문을 만났던 많은 사람의 책을 보았지만, 거기에도 정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택했다. 죽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을 수도 있고, 그저 쓸데없는 질문이라서 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냈다. 나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근래에 보게 된 최재천 교수님과 김상욱 교수님의 대화에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내가 마지막으로 이르렀던 지점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내용을 들었다. 삶을 포기한다거나 삶에 대한 굳건한 의지로 이 시련을 견뎌낸다거나 하는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정말 이 단어 그대로 ‘그냥’ 사는 것이라는 말.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고통총량의 법칙이라던가 권선징악같은 말은 어쩌면 말 뿐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누군가에게나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 이미 몇 번의 힘든 일들을 겪었다 하더라도 또 다시 어떤 나쁜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 또한 그냥 일어나는 것일 테지. 어떤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것, 말 그대로 랜덤. 이 ‘그냥’이라는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으니 그 의미 없는 단어가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그냥 그냥이 모인 이 순간들을 이왕이면 잘 살아보자. 이렇게 마무리를 해야 예쁜 글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좋은 메시지도 주고, 그럴듯해 보이니까. 그런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열심히 살고 싶을 땐 열심히 살면 된다. 그러다 더이상 그러기가 싫어졌다거나 그럴 힘을 잃었을 때, 가수 이효리가 모 프로에서 ‘뭘 그냥 좋은 사람이 돼, 아무나돼’라고 했던 말처럼 지금 좀 힘들다면 그냥 살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너무 애쓰지 말고 기를 쓰지도 말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저런 질문을 마주할 때도 그냥 또 그런 시간이 왔나 생각하고 넘어가지도록 그냥 그런 하루들을 살아가는 것. 그것도 괜찮지 않나. 무언가 거대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그냥 살아가는 하루. 난 괜찮다고 생각한다. 난 아직도 저 두 질문에 대한 정답도 대처방법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정답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삶을 살다가 나와 같은 질문을 해본 적이 있고, 그로 인해 많은 고민이 되었다면 이 글이 위로가 되면 좋겠다. 이 그냥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가장 적당한 때에 나도모르게 슬쩍 열정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들게될 것이다. 그때까지 온몸에 힘을 빼고 그냥 살아보자. 지금의 나처럼.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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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than 2023/10/16 [17:07] 수정 | 삭제
  • 구름처럼 그냥 흘려보내는 것. 더 높이 떠있는 태양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 이타적인 마음과 행동으로 행복을 찾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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