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전제품을 바꿔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이사 때문이기도 하고, 밥솥이나 청소기 같은 몇 가지 가전들이 수명을 다해 새로 사야 했다. 사야 할 게 많아서인지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더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핸드폰을 들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원하는 제품을 검색한 뒤에 추천순이나 판매량순, 리뷰많은 순으로 나열해서 본다. 후기도 좋고 판매도 어느 정도 되어 검증(?)이 된 것 같은 몇 가지 브랜드의 상품을 추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원하는 디자인과 기증이 장착된 가성비 좋은 제품을 선택해 주문한다. 보통 이런 순서로 물건을 고르곤 한다. 그런데 보다 보니 전자제품 중에는 상품명 바로 옆에 알파벳과 숫자로 조합된 이름이 있었다.
평소에는 그냥 보고도 지나치곤 했는데, 전기밥솥을 사려고 보다 보니 외형은 거의 비슷한데 옆의 모델명만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가지 이름으로 된 제품인데 모델명이 각기 다른 비슷비슷한 제품들이 몇 가지씩이나 되었다. 내 눈에는 똑같아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다른 것인지. 한 제품씩 상세페이지에 들어가 그 제품에 관해 공부(?)를 하다 보니 밥솥 하나를 고르는데 이미 두 시간도 훌쩍 넘게 흘러 있었다. 그것도 눈이 빠질 만큼 시리지 않았다면 아마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봤는데도 나중에는 머릿속에서 여러 제품이 다 섞여서 어떤 게 어떤 거였는지 너무 헷갈렸다. 하아-. 누가 나 대신 다 골라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래서 퍼스널쇼퍼라는게 있는건가.
쇼핑이라면 응당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비슷비슷한 제품들을 보다 보니 머리도 아프고 지루하고 피곤해졌다. 쇼핑이라는게 이렇게 괴로워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평소에 쇼핑광은 아니지만, 쇼핑을 좋아하는 일인인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쇼핑이 귀찮고 피곤하다니. 즐거워야 할 쇼핑이 왜 이렇게 나를 지치게 할까 생각해 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앞으로 세상이 더 얼마만큼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도 물건의 다양성이 흐르다 못해 넘쳐나는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무언가를 사고 싶어서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원하는 상품 한 가지만 검색해도 종류가 수백 수천 가지가 넘는다. 물론 그중 아주 잘 팔리는 것들은 몇 가지에 불과할 테지만, 가짓수만 세어보자면 페이지를 몇 번이나 넘겨보아도 새로운 제품이 끝도 없이 나온다. 정말이지 각종 물건이 수도 없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에 비하면 내가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단출했다. 시계가 사고 싶으면 백화점이나 시계방에 가서 몇 가지를 보고 그 안에서 고르면 그만이었다. 옷을 사야 할 때도 백화점을 가거나 동네 시장에 있는 상점에서 사곤 했고, 생일이면 동네에서 나름 이름난 빵집에 들어 케이크를 샀다. 그때도 여러 종류의 상품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정말 적은 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터넷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말 우리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한 종류의 상품에도 수백 수천 가지의 다른 종류가 있고, 모두 제각각 조금씩 다 달라 그 종류가 무엇무엇이 있는지 다 알 수도 없다. 그저 잘 눈에 띄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될 뿐이다. 다양한 제품군이 있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고른다는 것은 너무 반갑고 좋은 일이지만 다양성을 넘어 이렇게까지 많은 일인가 싶을 때가 있다. 나름 인터넷 검색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나도 이런데,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인터넷 세상이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에게는 참 복잡하고 힘들겠다 싶기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은 당연한 것이고 또 그 변화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겠지만, 가끔은 옛날의 단순했던 생활방식이 그립다. 몇 가지 내에서 물건을 고르면 그만이었던 그런 생활방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방식은 사람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언어가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예전보다 지금이 생각해야 할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비교하고 따져봐야 할 것도 훨씬 많아졌다. 모든 것이 너무 많고 복잡해진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 미니멀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이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이사를 하면서 짐을 정리하다 보니 나도 물건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구석구석 어찌나 잘 숨겨놨는지 다 꺼내어 보니 우리집에 이렇게 많은 짐이 어떻게 들어갔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내가 짐이 적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있는줄도 잊고 있었던 물건들이 이렇게나 많을줄이야. 인터넷속의 수많은 상품들처럼 우리집도 짐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언젠가부터 복잡했던 머리가 사실은 이 많은 짐과 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도 싶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가전과 제품만 구입하고 이번에는 짐을 좀 줄여보기로 했다. 단촐한 생활방식을 유지하다보면 머리도 좀 단출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다.
짐을 정리하면서 필요없는 물건들을 버리고 나누고 하다보니 빈 공간이 생긴다. 막상 빈 공간이 생기니 뭔가 집의 기운이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공간이 넓어져서 일수도 있겠지만 그냥 내 기분이 좋았다. 이제까지 맥시멀리스트로 살아온 내가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쓸모없는 물건과 생각은 버려가며 조금씩 ‘정리’를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 사야 했던 물건과 이미 가지고 있었던 많은 물건 사이에서 힘들었던 나를 기억하면서 미니멀리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딘가 빈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비워진 공간은 이상하게 채우고 싶은게 나같은 사람의 심리지만, 빈 공간에서 받는 기분 좋은 느낌을 알았으니 시도해 볼만 하다. 모든 것이 너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이 상품이든 머릿속이든 홍수에 넘쳐나는 물건과 정보에 휩쓸려다니지 않게 살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오늘은 지난 편지를 가득 쌓아둔 오래된 박스를 하나 열어 정리해보려고 한다. 누구나 그런 박스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 지금당장 쓸건 아니라서 상자에 넣어 어딘가에 두고 오래동안 열어보지 않은 그런 박스. 그 박스를 열어 정리를 해보면 어떨까? 좋은 시작이 될 것 같다.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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