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끝에서 찾은 행복' 김광석씨 삶

최세진 | 기사입력 2007/10/25 [11:21]

절망 끝에서 찾은 행복' 김광석씨 삶

최세진 | 입력 : 2007/10/25 [11:21]

 행복은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꽃처럼 가꾸고 거름을 주고 정성을 들여 만들어 가는 것이다.


▲ 시각장애인 김광석씨     © 문화저널21
시각장애인 김광석 선생님을 만나고자 경기도 근교 산과 숲이 어우러져 있는 조용한 마을에 위치한 그의 자택으로 방문하였다.약속된 정확한 시간에 가족들이 현관에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며 인사를 나누었다.

필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시각장애인은 보이질 않아서 다시 한 번 김광석 선생님
을 찾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가 김광석입니다. 반갑습니다. 라며 악수를 청하며 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분명히 시각 장애인이라고 했는데…?

나의 눈을 의심하며 우리 일행은 그가 안내하는 데로 집안으로 들어 갔다. 집안 현관에는 여러 가지의 난초들이 향과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 왼쪽에 있는 콩 난은 전통 기왓장에 달라붙어서 지금 아주 번식이 잘되고 있습니다. 또한, 두 번째에 있는 제주한란은 지금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하고 있는데 너무나 향이 아름 답지요. 한번 향을 가까이 맞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하였다. 아니 정말 이분이 시각 장애인이 분명한가?
 
이제 거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여보 차 좀 준비해 주세요. 장애가 없는 사람보다도 더 섬세하고 현상파악을 분명히 했다. 또한, 시각 장애인의 걸음걸이는 왠지 미지의 세계에 첫걸음을 내미는 모양새로 표시가 나는데 이분은 그런 잰걸음걸이가 아니다.
아마 시각 장애인도 급수가 있는데 이분은 사물이 흐릿하게라도 망각에 비치는 시각
장애인이구나 하고 판단했다.

자리에 않자마자 첫 질문을 했다.시각 장애인도 등급이 있나요?

 선생님은 전혀 앞이 안 보이십니까? 네 전혀 앞이 안 보입니다. 전 빛도 느끼지 못하는 1급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러면서 시각장애인은 안보이는 정도가 개개인별로 다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리 자연스러우십니까?

전 중도에 실명했기때문에 어려서 실명한 사람보다는 자연스러울수 있고 또 실명한이후에 상대방의 목소리를 따라 얼굴을 바로 보고 눈을 맞추려는 노력을 많이 했지요. 적응해가면서 더욱 소리에 민감해지고 보았던 기억대로 자연스러운 표정과 행동을 하려고 한 것뿐이지요.그는 대화중에 나의 표정과 제스춰를 자신이 본 것처럼 우리 일행에게 설명해 주었다.

김선생님 놀랍습니다. 어떻게 안보이면서 제 표정과 제스춰를 아실수 있나요?그 것은 소리로 보는 것입니다. 소리만 듣고도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표정과 몸짓을 알수 있지요.
참으로 예민하고 정확하였다. 내가 무척 놀라니 그는 보지못할뿐이지 느끼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느끼며 알수있다면서 시각장애에 대한 설명을 자연스레 해 주었다.
 
꿈과 낭만이 있던 학창시절

김광석씨, 그는 1953년생으로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1972년 명문대인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에 입학하였다. 성실한 그는 열심히 학창시절을 보냈다. 교수들의 총애와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으며 좋은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1976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응용통계학과에 입학하였다. 학자로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대학원 시절을 보냈다.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과 조교, 세계은행(ibrd) 수출업체 실태조사반 어시스던트로의 활동등 정신없이 바쁘게 후회없는 대학원 시절을 보냈다.
  
 투병생활과 좌절

대학원과정을 마치고 석사논문을 쓰던 1977년 12월 갑자기 눈앞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무리했구나 하며 논문을 마치고 안경을 써야겠다하며 병원을 찾은 그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포도막염이라는 눈병이라며 치료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그의 투병생활은 시작되었다.

조금 지나면 회복해 다시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으나 나아지는 것같다가 다시 악화를 거듭하였다. 대학원 친구들은 논문을 마치고 유학을 떠난다 하며 하나 둘씩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돌아 갔다. 그들앞에서는 의연한 모습이었으나 친구들이 다녀간뒤엔 너무나 처절한 심정이 되었다.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선두에 섰던 그에게 점점 흐려지는 시력은 자신이 그들과 나란히 함께 할수 없다는 패배감에 좌절과 고통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그의 꿈을 이루기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투병하여 다시 회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병원으로 달려 갔다. 이런 투병생활은 5년동안 계속되었다. 가족 특히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를 듬북 받았던 그는 자신의 심적인 아픔과 고통을 어머니앞에서는 차마 표현할 수도 없었다. 한 번은 서재에 꽂힌 자신의 쓰다만 논문 원고를 흐린 시야로 바라보다 격정에 못이겨 모든 책과 노트를 방안에 마구 집어 던지며 소리없이 울부짖었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벼랑끝에 서있는 자신의 심적 고통을 이겨내기위해 어머니를 따라 성당을 다니면서부터 심적인 안정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클래식음악에 심취해가며 열대어키우기를 통해 잡념을 잊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투병 5년후 1982년에 그는 완전실명하게 되었다.

  역경을 극복한 새로운 삶

완전 실명직전인 투병 5년째 그는 자신이 얼마 않있어 실명하게되리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엄연한 현실이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살 희망도 없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
순간 그에게 다가온 것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온삶이 너무나 아깝고 억울하였다. "그래, 다시 해보는 거야.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 뭐가 달라진다는 것인가?"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삶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어느 날 점자성경을 구하기위해 명동성당에 전화를 걸었다가 가톨릭맹인선교회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여러 명의시각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앞을 못보는 고통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보다 더 어렵고 불편한 사람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새로운삶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는 가톨릭녹음도서관장이 되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책을 녹음하여 녹음도서를 만들어 우편을 통해 대출해주는 활동을 하였다. 봉사자들을 교육하고 녹음도서를 제작하여 독서에 큰 불편을 느끼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빛을 전하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1983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의 아마추어무선사가 되어 체신부로부터 hl2awo라는 호출부호를 부여받아 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맹인 아마추어무선사회를 창립하여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햄 교육과 무선 통신 활동을 하였다. 또한 가톨릭신자들을 위한 햄 단체인 가톨릭아마추어무선사회를 창립하여 비장애인들을 위한 햄강습회 및 햄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 컴퓨터작업을 하는 김광석씨     © 문화저널21
또한 1987년부터는 시각장애인들이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음성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맹인용구개발위원장이되어 시각장애인의 컴퓨터 이용에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그야말로 그는 실명이후 끊임없이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 왔다.그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후 학문에로의 꿈을 다시 이루기위해 1992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여 내내 올a학점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이후 사회복지와 장애인복지에 관련된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강의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

그는 가톨릭녹음도서관에서 봉사자로 그를 도왔던 김레지나씨와 1987년 1월에 결혼하였다. 신앙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그와 함께 했던 김레지나씨와 그는 녹음편지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진실한 만남을 나누었다. 다도강의에 많은 활동을 하고 있던 레지나씨로부터 다도를 배우고 함께 음악회, 전시회를 가면서 문화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김광석씨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부인 레지나씨는 서예, 다도, 꽃꽂이에 상당한 조예가있었으며 결혼이후에는 한지미술에 심취했다. 한지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전통 한지작품활동과 강의에 전념하고 아들 찬울을 키우며 풍족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가정속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 왔다.

 
▲ 한지작가 김말순 레지나씨 작품 '태고'     ©문화저널21

김광석씨는 아빠로서도 자상하고 따스한 분이다. 아들의 자라는 모습을 사진이나 비디오로 담아 놓을 수 없는 그로서는 아이의 성장과정을 일일이 녹음하기 시작했다. 갓난 아이때부터 노는 모습, 가족이 나들이하여 함께 하는 모습등 수십개의 테이프에이르른다.  음성앨범을 만들어 자신의 큰 기쁨이 되고 아이에게는 크나큰 선물이 되었다.  
   
  향후 계획과 봉사활동

갑작스럽게 장애라는 큰 산을 넘어 온 그를 보며 장애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진한 감동을 주는 그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 대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깨닫게한다.

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카돌릭녹음도서관장과 각종 사회봉사활동 및 카돌릭 아마추어무선사 회장 , 사회복지 및 장애인복지에 대한 강의등으로 이 사회와 장애인들을위해 직간접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편견 없이 아름다운 삶을 공유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고 장애인복지를 위한 강의와 사회활동에 전념하고자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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