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하는 임금은 졸군 (拙君)이고,백성과 함께한 임금은 친군(親君))이다

옛날의 갈국(葛國)은 北韓과 비슷했다

김유혁 | 기사입력 2008/10/30 [06:56]

과시하는 임금은 졸군 (拙君)이고,백성과 함께한 임금은 친군(親君))이다

옛날의 갈국(葛國)은 北韓과 비슷했다

김유혁 | 입력 : 2008/10/30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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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경(三字經)에서 보면 족한상심(足寒傷心)이요 민원상국(民怨傷國)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속담에 발이 따듯해야 잠이 잘 온다는 말의 뜻과 상통한다.

발은 심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추위를 많이 타게 되고 겨울철에 동상에 걸리기도 쉽다.  그러므로 발이 시리면 잠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발이 시리면 마음이 불안해지기 때문에 족한상심(足寒傷心)이라 한다. 

  백성은 나라의 손발과도 같다.

백성이 살기 어렵다고 원망한다면, 이는 마치 발이 시려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프듯이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진다 하여 그런 현상을 일컬어 민원상국(民怨傷國)이라 한다.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편안하게 잠잘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치세(治世)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졸면(眠)자는 눈목(目)변에 백성민(民)자를 쓴다. 堯임금 시대에 불리었다는 격양가(擊壤歌)는 그 뜻을 잘 전해주고 있다.

참고로 경양 가의 가사(歌詞) 일부를 소개한다.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집에 돌아가 잠을 자며(日入而息), 밭을 갈아 먹고살고(耕田而食), 샘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鑿井而飮), 나에게 임금님의 힘이 어떻게 미치고 있다는 것인가? (於我 帝力 何有哉?).

  임금 된 사람이 자신이 임금임을 내세워 백성 앞에 분별없이 나타나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졸군(拙君)에 해당한다.

그러나 백성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현장에 동사섭법(同事攝法)하는 자세로 몸을 들어내어 애환(哀歡)을 함께하는 임금은 백성의 어버이 같다 하여 친군(親君)이라하며, 백성의 생활실정을 미리 파악하여 믿음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는 임금을 현군(賢君) 또는 명군(明君)이라한다. 

  역사는 현재를 위해서 과거사를 거울처럼 비추어주고 있다.

졸군(拙君)치하에서 민원(民怨)이 깊어간다는 것은 마치 동상에 걸려서 잠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누누이 귀띔해주고 있다.

백성이 굶주려있고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아사상태에 놓여있는데도 위대한 지도자 놀이나 일삼는 나라가 있다면 그런 나라를 내버려뒀던 역사는 거의 없었다.  

  古代 국가 중에서 하은주(夏.殷.周)는 훌륭하게 치세(治世)를 연 나라들이다.
夏나라의 우왕(禹王)은 9년간 장마로 말미암아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었을 때 황하(黃河)를 창의적인 치수법(治水法)으로 관리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의 아버지 곤(鯤)은 처음으로 순(舜)임금으로부터 황하치수(黃河治水)의 명을 받았었다. 10년간 답사를 통하여 얻어낸 결론은 산맥 하나를 끊어서 유로(流路)를 마련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끊어야 할 산줄기에는 그의 조상 묘가 있었다.
그 묘는 왕손을 얻을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졌었다.
곤(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명을 따르자니 왕손을 버려야 하고 왕손을 얻자니 왕명을 어겨야 한다는 기로(岐路)에 서게 되었다. 

곤(鯤)은 왕손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왕명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왕명을 어긴 죄로 그는 처형됐다.  순임금은 사형수의 아들인 우(禹)에게 황하치수를 다시 맡겼다.

우가 12년간 답사했던 결과 치수방략(治水方略)의 결론은 그의 아버지 곤(鯤)과의 결론과 같았다.

우(禹)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아버지 곤의 처형이유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깨달음은 나랏일을 수행함에는 공과 사가 충돌하게 되었을 때에는 서슴없이 선공후사(先公後私)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는 그 순간 두 가지의 판단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겹눈동자(目有重瞳)의 혜안을 지닌 순임금은 禹氏 문중의 명당묘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하치수 성공자에게 왕권을 넘긴다(治黃河者 制天下)는 언약을 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당묘지는 영원히 명당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치수성공을 하게 되었고 동시에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는 공적인 일을 위해서 사심(私心)을 버렸다는 이른바 봉공기사(奉公棄私)의 표본을 후세의 교훈으로 남겼다. 이것이 곧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실천이다. 

  殷나라는 7년간의 가뭄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사회적 소동이 일곤 했던 시대였지만 희생정신으로 백성을 구해낸 帝王으로서 탕왕(湯王)은 아주 유명하다. 

그 당시 기우제의 의식(儀式)에는 동자(童子) 혹은 동녀(童女)를 화염(火焰)속의 제물로 바치는 절차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위에 동녀를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지르는 순간이었다.  탕왕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탕왕은 기우제를 중단시키고 그곳에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해서 말했다.

나는 백성을 편히 살게 해줄 것을 약속하고 임금이 되었다.
임금 된 내가 어린 동녀를 불에 타죽게 하면서까지 임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백성을 위해서 내가 저 기우제 불에 몸을 받친다.  그대들은 어서 불을 지르라고 호령했다.

왕명에 따라 불을 붙였다. 화염이 치솟는 순간, 천둥이 치며 장대비가 내렸다.비가 내려서 가뭄이 사라지고 임금도 살아나는 기적이 발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탕왕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정치를 펴 가고자 다음의 반명구(盤銘句)를 되뇌곤 했다.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 임금 전용 목욕탕 욕 반에 새겨진 명심구)

  周나라는 文王의 文治와 武王의 武治가 조화롭게 승계되어 문무겸치(文武兼治)의 대성세(大聖世)를 이루었다.

기산(岐山) 남쪽 대나무 숲에서 鳳凰이 날아든 것으로도 유명하거니와 殷의 末王인 폭군 주왕(紂王) 치하에서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天下人心의 2/3를 점유하는 덕망 높은 군주였다.

주왕(紂王)의 요구에 의하여 주토(周土)의 상당부분을 봉납(奉納)하고 석방되었다.

  당시 天下의 人心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은 周亡說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文王은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백성을 구출해낼 수 있는 상황이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天下人心을 읽을 줄 아는 이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國土라는 것은 권력의 범주(範疇)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인심의 向方과 더불어 그 屬性을 달리하는 것임을 깨우쳐 주었다.

즉 周土를 紂王에게 다 바친다 해도 천하의 인심이 紂王을 버리고 文王에게로 돌아오면 그 백성이 사는 향토는 자연스럽게 周土로 還元된다는 것이다.

周나라의 천하통일의 배경은 이렇게 전개됐다.

문왕(文王)의 인덕정치(仁德政治) 이념을 하늘도 감응했다는 듯이 그에게 성왕을 상징하는 봉황(鳳凰)이 날아들게 되었다고 한다. 최고지도자 의자에 봉황 그림이 그려지게 된 전통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湯王이 이끄는 殷나라의 초기 王都는 호(毫)라는 지역이었다. 毫는 갈국(葛國)과 이웃하고 있었다(與葛爲隣). 그런데 갈국의 왕은 방종하여 先祖에게 제례를 올리지 안 했다(放而不祀). 湯王이 사신을 보내서 祭禮 올리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제물 용으로 쓰일 犧牲(牛羊豚)이 없어서라는 것이다. 湯王은 제수용(祭需用) 희생을 보내주었다. 그런데도 葛王은 또 祭禮를 올리지 안 했다. 그 연유를 물으니 제삿밥과 祭酒를 장만할만한 곡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湯王은 農耕人力을 보내서 耕作에 힘써 곡식생산을 도와주고 술을 빚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술 맛을 본 葛王은 백성이 빚은 술까지 빼앗아갔다. 不應하는 자는 다 죽였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자, 湯王은 葛王을 정벌했다.

그랬더니 그곳 백성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환영했다. 동쪽 지역을 향해서 進擊하면 서쪽 주민들이 원망하고, 남쪽지역을 향해서 進擊하면 북쪽 주민들이 원망했다. 어째서 우리 지역으로 먼저 進擊해주지 않느냐는 원망이었다.

마치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듯이 말이다.
(東面而征 西夷怨, 南面而征 北狄怨, 奚爲後我? 民之望之 若大旱之望雨也).


   옛날의 갈 국(葛國)은 어쩌면 現 北韓과 꼭 닮은 듯하다.

* 해마다 肥料를 보내줘도 필요한 양의 비료를 스스로 확보하지 못하는 것 같다.
* 糧穀을 보내줘도 주민들을 굶기지 않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 같다.
* 生必品을 보내줘도 북한주민들의 소비생활수준은 향상되지 않는 것 같다.
* 經費를 대주면서 공동행사를 치러도 달라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金剛山 관광비도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일대 지역사회는 개방되지 않고 있다.
*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의 참혹한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 핍박받는 良民들의 고생도 여전하기에 탈북자가 날로 늘어나는 것 같다.
* 탈북자들의 자발적인 대북주민을 위한 운동의 목적으로 펴 가는 풍선전단 날려 보내는 것에 대하여 과민 반응하는 것을 보면 북한당국은 주민들을 감싸 안을만한 자신과 신뢰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같다. 

  우리가 만약 湯王이 葛國을 향해서 태도를 보였던 것처럼 以北 五道民과 더불어 北韓 땅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면 北韓 各 道民들은 우리 고장에 먼저 와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을까?
보도가 전하는 바로는 금년도 수확하는 농산물 가운데 3-5개월분만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에서 군량미로 거두어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을 추수 시기로부터 3-5개월 뒤는 다음해 1-3월경에 해당한다.

농사지은 것 전량을 농가소득으로 줘도 햇보리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춘궁기(春窮期) 또는 보릿고개 (맥령기:麥嶺期)라고 했었는데 북한당국에서는 인위적인 춘궁기를 만들어 가는 셈이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테러지원국이라는 낙인이 해제된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민원상국(民怨傷國)이라는 현실을 먼저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정다산 선생이 그의 이담록(耳談錄)에 남긴 구절 중에 천인소지 무병이사(千人所指 無病而死)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면 병들지 않아도 죽게 된다는 뜻이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恒山  김유혁 박사의 제왕학-34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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