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문화강대국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길

<발행인 칼럼>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 즈음해서

최세진 발행인 | 기사입력 2011/02/15 [11:12]

대한민국, 문화강대국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길

<발행인 칼럼>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 즈음해서

최세진 발행인 | 입력 : 2011/02/15 [11:12]
무명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변사사건에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변사사건의 원인이 유서를 통해 알려진 대로라면 먹을 것이 없고 병고에 시달렸다면서 실제 자필로 먹을 것이 있으면 넣어달라는 글을 남기기도 한 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최고은씨는 영화의 대본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문화인의 한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문화인이란 다른 계층, 일테면 물질을 원료로 가공물을 생산한다거나 물건을 받아다가 팔아서 이익을 챙기는 부류와는 달리 전시대로 치면 지식인이면서 양반계급에 속한다. 그런 그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채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생각 있는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의 어떤 모순점을 깊이 생각했으리라.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이면서 자본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베버는 문화지체(文化遲滯)라는 용어를 썼다. 즉 문명, 물질은 앞서 가는데 정신은 이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국가발전에 큰 지장을 가져오면서 개인의 행복권을 저해시킨다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는 나라와 개인의 온전함을 이루는 기본인데 한쪽만 앞서 간다는 것은 어딘가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봉건시대에 양반과 천민, 무신과 문신이 있듯이 양쪽이 조화를 평화롭게 갖춰야만, 계층 간의 갈등과 세대 간의 화합을 이루는데 아무래도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그 생산에서 남는 이익이 많아야 하는데 글을 쓴다는 자체가 정신적인 생산은 가능하지만, 물질을 얻는 데는 미흡한 것이다. 눈에 보이고 편리한 것만 추구하는 현실에서 글이란 선비나 학자만이 갖는 고급 일거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인식이 국가 지도자, 정치인, 기업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 대학은 인문학이 사라지고 첨단학문만이 생존하면서 그쪽으로 가야만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인문학이란 과학이나 의학, it 공학 등을 높여주기 위한 기본적인 학문인데, 이 학문이 행방불명되면서부터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점차 사라지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실제로 필자는 경영자들의 모임이나, 의학계통 등의 모임에 가보면 그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윤기와 핏기가 도는 반면, 문화예술단체 또는 철학자나 문학가 단체의 모임에 가보면 참석자 거의 모두가 빈기(貧氣)가 돌고 입성 역시 초라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유명한 작가나 무명의 작가나 그것은 거의 한가지이다. 유명 작가라고 작품이 많이 읽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가난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있기에 이 사회의 도덕성과 양심이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문화예술인을 위한 최소한의 생계지원 제도”를 검토해야

문학만은 아니다.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등 모든 문화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추구하는 업에서 생계를 거의 기대하고 있지 않다.

화가도 몇몇 유명인만 빼놓으면 물감 값에도 빈궁을 느끼고 능력 있는 성악가는 마땅한 무대가 없다. 무대란 성악가나 예술인들에게는 자신의 역량을 높여보고 거기서 보람을 느끼고 또한 생계에 다소나마 도움을 얻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무대가 없고 문학인이 글을 쓸 잡지의 지면이 없다는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영화배우는 자신이 출연할 작품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그 업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삶과 그것들이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부정직하게 돈을 벌어 졸부가 된 사람들의 자서전 집필이나 해준다면 개인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적인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제도를 이번 기회를 통하여 국가는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문화가 죽으면 문명도 오래가지 못한다. 문화와 문명은 양 날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의 본관 벽에 빈센트 반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모작이 걸려있다. 렘브란트와 반고흐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어쩌면 해양국가의 이미지보다 문화강국 국가로 한 단계 올려준 위인들이 아닐 수 없다. 생전에 반고흐는 엄청난 가난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도움을 청한 것은 그의 다섯 살 아래인 동생 테오였다. 생전에 오직 그림 한점, 그것도 아주 싼 값에 팔렸던 것이다.

그림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고 삶의 의지를 다짐했던 반고흐, 그러나 지금 그가 그린 그림과 함께 그가 살았던 조국 네덜란드에 국가 브랜드 지수를 얼마나 올려놓았는가.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국가를 발전시키고 좋은 이미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삶에 찌들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작품 활동에 매진한 반고흐, 지금 그의 그림은 수천억을 호가하며 돈보다도 더욱 귀중한 국가의 품격과 문화의 저력을 표출하여 국가브랜드가치를 얼마나 수직으로 상승시켰는가?

인도의 타고르 시인으로 말미암아서 인도의 국가브랜드 지수와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가, 그가 예언한 대로 동방의 작은 횃불이 세계사에 새롭게 비칠 것이라는 말을 되씹어 볼 일이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문화예술을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문화예술 발전에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저 경제만 잘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룩된다고 믿는 자본주의적 사고의 인적네트워크에 둘러싸여 문화예술이 죽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예술, 즉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경제적 성과물도 없지만, 물질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문화가 아닌가. 문화가 죽어가고 문화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가난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죽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문화저널21 발행인 최세진 master@mhj21.com
1>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