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석 칼럼] 시나브로 써 내려간 즉흥곡의 묘미

나태주 시인의 시세계

서승석 | 기사입력 2023/05/02 [09:56]

[서승석 칼럼] 시나브로 써 내려간 즉흥곡의 묘미

나태주 시인의 시세계

서승석 | 입력 : 2023/05/02 [09:56]

한국시인협회 전 회장, 나태주 시인이 이번에 50번째 시집 ‘좋은 날 하자’를 상재하였다. 시력 52년에 50권의 창작 시집이라고 한다. 나태주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이 순정한 시심을 간직한 시인이다. 43년간 초등학교 교단에 서 왔던 경력 때문일까. 그는 소년처럼 맑고 순수한 마음에 투영된 삶의 근원적 기쁨을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쉽고 간결하게 노래한다.  

 

▲ 나태주 시인의 50번째 시집 '좋은 날 하자' 표지   © 이환희 기자

 

오늘도 해가 떴으니

좋은 날 하자

 

오늘도 꽃이 피고

꽃 위로 바람이 지나고

 

그렇지, 새들도 울어주니

좋은 날 하자

 

더구나 멀리 네가 있으니

좋은 날 하자.

 

      - ‘좋은 날 하자‘ 전문

 

이 얼마나 소소한 행복의 조건인가. 새 아침에 솟아오르는 해, 꽃과 바람과 새, 게다가 그리워할 수 있는 너까지 멀리 있으니 금상첨화. 더 이상의 바람은 그야말로 죄가 될 것만 같다. 시적 화자는 삶의 지침을 장황한 설교가 아니라 그저 소박한 몇 줄로 요약한다.

 

위 인용 시는 이브 몽탕이 부른 샹송 ‘고엽’으로 유명한,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가 주기도문 형식으로 쓴 시 ‘하느님 아버지Parter Noster’를 상기시킨다. 프레베르는 75년 출간된 자신의 시집 '꽃집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거기 그냥 계시옵소서/그러면 우리도 땅 위에 남아 있으리다/땅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우니Notre Père qui ê̂tes aux cieux/Restez-y/Et nous nous resterons sur la terre/Qui est quelquefois si jolie”

  

프레베르는 시집 '꽃집에서'의 해제를 맡은 김화영의 지적대로 ‘’대중적‘ 시의 참다운 가능성’ 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 그와 나태주의 비교연구도 해 볼 법하다. 쉽고 자연발생적인 태연한 어조로 그들은 민중의 언어로 때로 해학적인 기지를 발휘해가며, 삶의 희로애락을 글로 쓴다. 마치 걸어가면서 다정하게 말을 하듯이…  

  

잠시 

네 곁에 머물다

가고 싶다

 

한 장의 그림처럼

한 소절 음악처럼

 

너도 그렇게

내 곁에 잠시

머물다 갔으면 한다.

 

      - ‘곁에‘ 전문

 

인생의 성공 여부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잠시 그 곁에 머물고 싶은 사람이란 그림이나 음악처럼 우리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사람일 것이다. 반딧불처럼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인생사를 시인은 크로키처럼 간결한 필치로 다음과 같이 드로잉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페인의 그라나다 알람브라궁전

(중략)

 

쫓겨서 울면서, 울면서 넘어갔다는

시에라네바다 산등성이

나는 유리창 너머로 오랫동안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었을까

들먹이는 마지막 술탄의

가냘픈 어깨가 보이는 듯했다.

 

      - ’유리창 너머‘ 부분

 

나태주 시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닿는 것은, 모두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비록 미미한 존재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꽃을 피워올리며 생명의 존귀함을 증명해 보이는 길섶에 나앉은 가냘픈 풀꽃, 그리고 패망하여 그토록 아끼던 알람브라궁전을 빼앗기고 도주하는 보압딜 왕의 슬픔까지도… 

 

▲ 나태주 시인 ⓒ서승석   

 

굳이 애써서 꾸미고 고민한 흔적을 보이지 않는 해학적이고도 경쾌한 어조를 은닉한 나태주 시세계의 묘미는, 시나브로 써 내려간 즉흥곡의 자유로운 선율의 조화로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향곡의 장중함이나 기교와는 달리, 즉흥곡은 작곡가나 연주자의 즉각적 감흥과 정취를 섬세하게 담아낼 수 있다. 나태주의 시는, 마치 필자가 시카고의 어느 바에서 들어 본 블루스Blues가 끊임없이 변주하는 인간의 슬픔과 고뇌와 절망감을 담고 있다. 다만 시인은 그것을 그다지 무겁지 않게, 크로키나 수채화처럼 가벼운 터치와 색감으로 장중함을 날려버리고 승화시켜 단아한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 시킬 줄 안다.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사막을 가슴에 안는다

 

얼마나 배고프고

얼마나 춥고, 덥고

 

목이 말랐으면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고

끝내 사막이 되었을까!

 

사막의 마음을 생각한다

 

아직은 참을 만하고

기다려줄 만하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나는 더욱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 ‘사막을 안는다’ 전문

 

물론 쉽게 써 내려간 시의 한계는 있다. 그리고 다작을 하는 작가가 반드시 훌륭한 시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는 단지 50여 편의 시로써 보들레르, 발레리, 랭보, 베를렌느와 더불어 상징주의를 대표한다. 그리고 19세 나이에 절필을 선언하고 37세에 요절한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는 16세부터 단 3년 동안 쓴 시편('취한 배' 외에 약 50편의 운문시 및 38편으로 이루어진 '일뤼미나시옹'과 '지옥에서 보낸 한철')으로 세계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또한 이상은 난해한 시로 많은 문학 연구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쉬운 시로 넓은 독자층을 확보할 수는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시의 깊이를 타진하는 평론가들에게는 외면당할 수도 있다. 필자는 나태주의 시가 영원한 생명력을 갖고 세계문학사에 길이 빛나기 위해서는, 즉흥적으로 그때그때 시를 뱉어내기보다는, 좀 더 치열하게 시상을 발효시키는 시간과 여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더욱 그윽하고 농밀한 언어의 향기를 은닉한 시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필자는 몇 해 전에 나태주 시인과 함께 마그레브의 고유한 빛과 색을 향유하며, 한국과 알제리 문학 교류를 위한 국제 펜클럽 행사로, 알제리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여행 중에도 그는 비행기 안에서도 쉬지 않고 원고 교정을 보고, 끊임없이 숨을 쉬듯이 시를 쓰고, 불굴의 의지로 촌각을 다투어가며 매 순간의 욕구와 충동과 감동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필을 계속하였다. 

 

장거리 여행에 고단할 텐데도 그는 부지런하고 근면하고 반듯한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알제리 문학 세미나를 개최했던 알제의 소피텔호텔 로비에서 만난 ‘낙타의 눈빛을 닮은’ 한국을 동경하여 한국어를 배운다는 한 소녀가 우리 시인들의 시를 손글씨로 빼곡히 적어놓은 그녀의 공책을 필자에게 펼쳐 보여주었다. 그때의 감격을 필자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전 세계의 독자들이 이처럼 언어장벽을 넘어 한국어로 우리의 시를 읽고 음미하고 낭송하여, 나태주의 시가 더 널리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서승석(미술평론가, 불문학박사, 한불문화예술협회 회장)

 

 

 

평론가(문학·미술)이자 시인 서승석 불문학 박사는 1995년 시집 ‘자작나무’ 출간으로 시작 활동을 시작해 2013년 ‘유심’ 평론부문에 등단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4-소르본대학교에서 비교문학 석사,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자대학교, 수원대학교 겸임교수 및 서울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자작나무’, ‘흔들림에 대하여’, ‘사람 사랑’, ‘그대 부재의 현기증’과 번역서로 파블로 피카소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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