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 칼럼] 3·1절에 다시보는 탑골공원 문화역사 오류(誤謬)

강인 | 기사입력 2023/03/06 [08:53]

[강인 칼럼] 3·1절에 다시보는 탑골공원 문화역사 오류(誤謬)

강인 | 입력 : 2023/03/06 [08:53]

지난 3월 1일은 104주년 3·1절이다. 당일 아침 모 주류(主流) 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를 보며 꽤나 마음이 불편했다. 

 

“무료 급식에 막힌 탑골공원..... 역사를 잊은 3·1운동 발상지”라는 제하(題下)의 사회면 기사이다.

 

물론 3·1절 기념일에 즈음하여 쓴 글이기에 다소 이해는 되지만 이 기사에서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 외에 다른 역사는 찾아볼 수 없거니와 특히 그 속에 켜켜이 쌓인 문화예술적 역사의 향기는 전혀 맡아볼 수 없다. 어찌 보면 탑골공원의 모든 과거가 항일(抗日)역사에 매몰되어버린 듯하다.

 

이는 그동안 일반 국민의 인식(認識) 속에 깊이 잠재되어온 내용이지만, 오늘까지도 탑골공원의 문화 역사적 사실이 바로잡히지 않는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

 

1897년에 조성된 탑골공원(사적 354호)은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名所)다. 이곳은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 3가에 위치한 1만 5천여 제곱미터의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3호인 ‘원각사비’ 등 소중한 유형의 문화재와 여러 무형의 문화유산을 소유한 보고(寶庫)다.

 

아마도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은 거의 모든 국민이 알고 있지만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국보 제2호인 것과, 그것이 탑골공원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탑골’이라는 명칭도 당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백탑(白塔)’이라 불렀던 원각사지 10층 석탑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귀중한 사적지가 수난과 오욕을 동반한 역사적 변천과,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현재는 그 빛을 잃은 채 급기야 속칭 ‘박카스 할머니’의 매춘(賣春)행위와 노인들의 급식 장소로 전락하는 등 홀대받는 ‘잡(雜)골’로 변모되었다.

 

이곳은 본래 고려시대에 세운 ‘흥복사(興福寺)’를 조선시대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였고 그 후 연산군에 의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으로, 조선 후기 한 때는 지식인이 모이던 장소로, 대한제국 시대에는 고종 황제의 명(命)으로 지정된 최초의 ‘서양식 도심공원’으로, 일제 강점기인 기미년(1919년)에는 3.1독립운동의 거사(擧事)를 일으킨 진원지로, 그후 일본 총독부에 의해 ‘승리(勝利)’라는 이름의 요정(料亭)으로 사용되는 등 숱한 변천을 거듭하였다. 또한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는 ‘파고다 아케이트’라는 명칭으로 상업지구화 함으로 한때 ‘파고다 공원’으로 불리워지기도 했으나 1988년 사적지의 경관(景觀)과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철거되었다.

 

국내 최초의 음악학교 개설 장소

 

조선 말기 고종(高宗)은 ‘충무공 민영환’을 특사로 러시아에 파견하였다. 이때 민영환은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군악대 창설을 제안, 허락받음으로 1900년 12월 19일 ‘칙령 제59호’에 의해 군악대가 탄생, 이로 인해 최초로 이 땅에 서양음악의 씨앗을 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악대를 이끌어갈 인물로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를 초빙하기로 결정,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박제순이 한국주재 독일 영사를 통해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에케르트는 1901년 2월 19일 가족과 함께 50인조 군악대가 사용할 관악기, 타악기를 가지고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도착하였다. 

 

고종은 에케르트를 군악대 교사로 3년간 고용계약을 맺은 후 탑골공원 서북쪽 부지에 별도의 건물을 짓도록 명(命)하고 그곳에서 27명의 군악대원에게 서양음악을 가르치게 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교이다. 

 

여기서 맹훈련을 받은 군악대는 약 6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1901년 9월 7일, 고종의 50회 생신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에 경운궁에서 연주함으로 외교사절들의 극찬(極讚) 속에 서양음악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후 1902년 고종의 요청으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에케르트는 1906년 10월 6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라고 시작되는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가 군악대장 ’백우용‘이 지휘하는 대한제국 황실군악대의 연주로 울려 퍼졌다. 이에 대한 공로로 에케르트는 고종황제로부터 ‘태극 3등급 훈장’을 받게 되었다.

 

이 대한제국 애국가는 몇 해 지나지 않아 1910년 한일합방으로 금지곡이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자국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요받게 된다. 아이러닉하게도 이 일본의 국가 역시 에케르트가 작곡한 곡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일본은 외국인이 작곡한 국가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한국인 ‘안익태’에 의해 작곡된 곡을 애국가로 부르게 된 것이 퍽 다행한 일로 여겨진다.

 

▲ 1906년 10월 6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군악대에 의해 최초로 연주되었다. 그 당시 찍은 기념사진(앞줄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군악대장 백우용, 그 왼편에 중절모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이 ’에케르트‘이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잊을 수 없는 은인 ‘프란츠 에케르트’

 

프로이센(Preussen)왕립 악단장을 지낸 에케르트는 우리나라에 앞서 일본에 파견되어 서양음악을 전해주었던 인물이다. 만일 에케르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음악계의 발전은 물론 오늘날 음악을 통해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을까?

 

특히 1907년 군대 해산에 따라 군악대도 해산되었지만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민간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했으며 같은 해 8월 1일 에케르트가 배출한 백우용을 중심으로 국내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경성양악대’가 탄생, 1920년 6월 1일부터 매주 1회 탑골공원에서 열린 연주회를 통해 당시 일본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시만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해 주었다. 이 경성양악대는 1945년에 창단된 ‘고려교향악단’에 이어 1948년 말에 창단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가 되었다. 

 

에케르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우리 음악계를 위해 헌신하다가 위암으로 투병 중 1916년 타계하였다. 더욱이 일본보다 한국을 특별히 사랑했던 에케르트는 자신뿐 아니라 딸의 가족과 손녀까지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을 위해 그들의 삶을 바쳤다. 딸 ‘아멜리에(Amelie Eckert)’와 결혼한 사위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은 당시 경성제대 프랑스어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 전쟁 때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당하다가 국제사회의 중재로 풀려난 외손녀 ’임마꿀라따(Immaculata Martel)’ 수녀는 독일로 귀환 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대구 성 베네딕트 수녀원에서 사역 중 81세의 노환으로 1988년 12월 5일 선종하였다.

 

이렇듯 프란츠 에케르트는 3대에 걸쳐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서 우리 음악인은 물론 국민 모두가 잊어서는 안 될 은인이다. 에케르트가 타계한 후 매일신보는 “악계은인(樂界恩人)의 장서(長逝)”라는 제하의 애도 기사를 게재(1916, 8, 8)했으며 한국일보는 “한국에 바친 3대”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1968, 8, 10)하기도 했다. 그들의 유해는 모두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국내 최초의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야외무대인 ‘팔각정’

 

앞서 고종은 탑골공원 내에 황실군악대를 위한 상설 야외 공연장 건립 계획에 따라 연주 무대로 사용될 ‘팔각정’이 세워졌다. 이는 당시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음향공학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건축가 ‘심의석’에 의해 설계, 건축되었다. 마이크나 확성기가 없었던 시기에 음향판 역할을 하는 팔각(八角)의 지붕을 통해 여덟 방향으로 골고루 퍼져나가도록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무대가 탑골공원의 상징인 팔각정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탑골공원의 팔각정이 일반 정자(亭子)와 같은 단순한 건축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인지 정부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어있는 팔각정의 성격을 일반 ‘정자’로 규정해놓고 있다. 이 팔각정은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앉아 장기나 두며 소일하는 정자가 아니라 100여 년 전 음향공학을 도입해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음악무대로서, 민족 슬기의 소중한 과학적 산물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심의석은 재래식 목조건축 양식과 서양식 석조건축 양식을 두루 연구한 당대 희유(稀有)의 건축가로서 이미 1886년 고종 황제로부터 교명(校名)을 받은 서소문 소재 배재학당(培材學堂)의 동관, 서관, 강당건물을 서양식으로 건축하였고 독립문, 그리고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를 건축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문화예술 공간으로의 역사적 재정립 

 

이처럼 탑골공원은 중요한 문화예술적 명소이지만 그 역사를 잃고 헤매왔다. 이제 탑골공원의 역사를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사찰(寺刹)로 복귀할 것인가? 기생방이나 요정, 혹은 상권 지역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3·1운동의 발상지로 국한시켜 보존할 것인가? 

 

사실 탑골공원이 3·1운동의 역사적 점유(占有) 공간은 아니다.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라고 명시되었듯이 상해임시정부 출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의거로 민족적 정기를 드높인 위대한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 후손들은 이 정신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탑골공원의 역사적 성격이 3·1운동의 발상지(發祥地)라는 의미에만 국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발상(發想)이다.

 

실제로 3·1운동은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요구를 위해 계획된 운동으로, 다음 해인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안주, 선천, 의주, 원산, 진남포 지역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서울의 경우 민족대표들은 일방적으로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탑골공원에서 인사동 태화관(泰和館, 당시 요릿집)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비폭력적 투쟁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3월 1일 오후 2시에 태화관에 모여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이에 탑골공원에 모여서 기다리던 군중들은 2시 30분경 한 고교생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 후 한반도 전역과 전 세계 한인 거주지역으로 확산되어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보면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라기보다는 서울지역 시위의 출발지로 표기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는 3·1운동과 관련하여 탑골공원을 폄하(貶下)하고자 함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는 의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지난 2018년 8월 15일 자 ‘J’일보 기사를 보면,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이나 관계기관 인사들의 조언 중에는 이곳을 3·1운동의 발상지로서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공원 안에 “민족지도자 33인의 수를 상징하는 33개의 가변형(可變型) 의자 설치”, “과거 3·1운동에 참여한 모든 고을의 이름을 새겨 민족의 광범위한 참여 강조”나 심지어는 “일본이 과거사를 사과하는 이벤트로 일본의 유명 조각가가 위안부상을 제작해 기증하는 방법” 등 비현실적 제안을 하는 분도 있다. 이는 한일관계를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하여 적대감만 키울 뿐이다. 과거 일제 36년간의 아픈 역사와 이에 항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민족정신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감정이 앞서거나, 더욱이 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 의도의 개입으로 미래의 국익을 위한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의 평화가 남북 간의 화해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글로벌시대에 이웃 국가는 물론 세계 모든 국가와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계획서를 보면 “3·1운동의 정신은 평화적 공존과 상생의 모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탑골공원이 3·1운동에 관한 외형적 시설 확충으로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보다는 음악적,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 민족의 선진적 우월성을 국내외에 드러내고 일제의 암울한 삶속에서 서양음악 연주회를 통해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장소, 모여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과거 시절 문화예술의 장소로 되돌아가 그동안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소중한 무형의 역사를 재현함으로 평화를 위한 ‘역사문화예술공간’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구체적 제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교, 최초의 서양음악 상설 야외공연장, 최초로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야외무대인 ‘팔각정’ 등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대한제국 애국가가 서양 악기 연주에 의해 최초로 울려 퍼진 역사적 장소이다. 특히 100여 년 전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서양음악 연주회가 공개리에 열렸던 것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로, 아시아 국가는 물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역사로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역사성을 회복하여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진다. 이를 위해 정부의 지원과 음악계와의 협력이 절실하며 이러한 공익적 사명을 이루려 함에 있어 몇 가지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시민이 동참하는 문화예술의 명소로 자리매김>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이다. 특히 탑골공원 주변은 젊은이(학원가), 노인(휴식처), 외국인 관광객(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음악인 및 음악애호가(낙원동 악기상가) 등 유통인구가 밀집된 곳으로 이곳에서 연주회 및 미술 전시회와 국악, 무용공연, 각종 학술 교양 강좌 등의 상시 개최로 예술애호가 및 각계각층의 시민을 동참케 함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국민화합의 명소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란츠 에케르트 동상 건립 및 기념사업회 결성>

 

탑골공원 경내에 한국의 은인인 프란츠 에케르트 동상 건립과 함께 음악계를 중심으로 기념사업회를 결성, 매년 기일(忌日)에 주한독일대사관과 함께 경모(敬慕) 대회를 실시함으로 외교적으로 한·독 문화교류의 증진을 꾀한다.

 

<일본인들의 관광 명소>

 

프란츠 에케르트는 일본 국가(國歌)인 ‘기미가요’의 작곡자다. 이 기미가요는 그들의 국기(國旗)인 ‘히노마루(日章旗)’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의 양대 상징이었다. 일본인은 자국의 국가와 국기가 모욕당하면 할복 자결도 불사하는 특징을 지닌 민족이다. 그러나 일본 지도자 중에는 기미가요가 외국인에 의해 작곡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에케르트의 동상도 일본이 아닌 독일에 세웠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에케르트의 유해가 우리나라 양화진에 묻혀있는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양화진에 소재한 에케르트의 무덤과 그의 동상이 세워질 탑골공원을 일본인에게 관광 코스로 개발하는 것은 관광산업 측면이나 한·일 우호 증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단합과 발전의 중심지가 되기를>

 

탑골공원은 우리 음악계의 본가(本家)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음악계는 시쳇말로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그야말로 죽은 음악인의 사회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 면에서 음악인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들은 각자 모래와 같이 빛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는 문화예술의 햇살이 비칠 때뿐이다. 해가 지면 그 빛을 잃는다. 지금과 같이 해가 져버린 시대에는 음악인이 단합해야 소생과 발전을 통해 음악계 본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탑골공원이 음악인을 하나로 묶는 시멘트 역할을 함으로 음악계의 단합과 발전의 콘크리트 같은 영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맺는 글

 

일찍이 영국의 ‘처칠’ 수상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인 탑골공원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이토록 홀대받고 있는 원인은 ‘역사를 잊은 것’이 아니라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거나 ‘음악 경시풍조에 의한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이는 ‘몰랐다’면 무지의 소치이고 ‘경시했다’면 문맹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나무도 뿌리가 튼실해야 잎이 무성하고, 꽃이 만발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뿌리가 되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실로 한 국가사회에 음악이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함을 감안할 때 이제라도 탑골공원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동안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역사를 재정립하여 탑골공원이 팔각정을 중심으로 상설 야외연주회의 재현과 문화예술인 및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모여 건전한 문화적 활동이 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기는 새 정부 출범에 즈음하여 탑골공원의 유관기관인 서울특별시와 종로구청, 문화재청 등 정부 관계기관에 의해 성숙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 외부필진의 기고 ,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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