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 금속활자(?)‘증도가자’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28)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21/08/04 [11:04]

세계최고 금속활자(?)‘증도가자’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28)

최병국 기자 | 입력 : 2021/08/04 [11:04]

활자(본)와 번각본의 실제적 차이 등을 고려한다면 동일 글자임이 분명

위조가능성 전무. 화염 속에 던져져버린 증도가자…인류시원의 활자 규명해야

 

2010년 9월1일 서지학자인 남권희 교수로부터 시작된 고려시대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진위논쟁은 지난 10여 년 간 고미술·문화재계의 최대이슈였다. 논쟁·검증·재검증 끝에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에서 고려금속활자('증도가자') 101점의 보물 지정 안건을 심의·부결하였으나, 남권희 교수 등 ‘증도가자기초학술조사연구팀’ 등의 (강력)반발과 국회학술심포지엄 등으로 (재)점화되어 국민적 관심을 증폭시켜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관계 자료를 중심으로 증도가자 진위논쟁의 내막(실체) 등을 분석·게재한다. 

 

▲ (자료1) 어조사 어(於) (증도가자와 고려시대 금속활자 55p)


최 이는 전란 중에 왜 시급히‘증도가’(목판)번각본을 발간하였을까? 

  

“세계최고 금속활자(?) ‘증도가자’ 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제27회(7.28)에서 신청활자의 소유권 이전 경로가 비교적 명료함에도 관계당국 및 (문화재)심의위원들의 “북한, 중국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심의 속기록)”라는 희한한 논리의 난무 속에 출처불명을 이유로 부결한 문제점 등을 지적했다. 6년 이상의 논쟁 속에 수차에 걸친 탄소연대측정 및 각종 과학감정 등을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위와는 관계없는 소장자 핑계를 앞세워 부결함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문화재의 진·위 및 가치가 소장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점에서 관계당국의 납득할 수 없는 논리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부결의 핵심 논거는 상인인 김종춘 소장품이기에 문화재로 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청은 절대적 증거능력(탄소연대, 과학감정결과)들을 외면(유보)하고, 연구영역에 불과한 서체분석, 주조·조판실험에 근거한 추정논리와 소장자의 비협조를 앞세워 ‘고려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으나 (문화재)가치 없다’고 부결함으로서, 오랫동안 정립되어온 증거법칙과 상식의 붕괴를 초래했다. 이렇듯 ‘증도가자’는 상인이 소장하고 있기에 어떻게든 부결시키려는 세력들의 담합 속에 화염에 불태워졌다. 인류의 금속활자 시원을 밝혀내는 ‘증도가자’를 이렇게 묻을 수는 없다. 국가적 차원의 진·위 규명이 절실한 상황이다. 

 

‘증도가’는 무엇이며, 무신정권 지배자 최 이가 전란 중 왜 활자본 ‘증도가’를 번각(목판)발간했으며, ‘증도가’ 관련 간행과 판본 및 (번각본)특징 등을 살펴본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 등을 살펴보면, ‘증도가’는 중국 당나라 영가의 현각선사(665〜713)가 남종선의 시조인 6조 혜능(慧能)에게서 선요(禪要)를 듣고 하룻밤에 증오(證悟)를 얻은 저자가 그 대오의 심경에서 증도의 요지를 247구 814자의 고시체로 읊은 시로서, 후대 송나라 남명천 선사가 풀이하고, 뒷글을 적어 1076년 절강성의 괄창(지금의 절강성 여수)에서 목판으로 찍어냈다. 

 

그 뒤 현각의 누이 정거를 비롯하여 동시대의 범천 언기, 송대의 법천 등이 각각 주석하여 책을 편찬했다. 이 주석본들은 모두 중국에서 판각된 목판본들이며, 이 주석본들 중 고려에서 금속활자로 인출된 것은 법천의 주석본으로서,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1232년)하기 이전 수도인 개경에서 활자로 주조하고 인출했다. 그러나 활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진양공 최 이(?〜1249)가 각공들을 시켜 금속 활자본을 뒤집어서 목판에다 번각, 인출했다. 이는 최 이의 발문으로 확인 된다(최 이 발문 : ‘증도가’는 선문에서 매우 긴요한 책이나 그 전래가 끊겨 유통되고 있지 않으므로, 각공을 모아 주자 본을 거듭 새겨 오래 전래될 수 있도록 하였다. 기해년(1239) 9월 상순 중서령 진양공 최 이 근지). 즉, 최 이는 전란(몽고 침입) 중에 전래가 끊긴 증도가(금속 활자본)을 번각(목판) 발간했다.  

 

1239년 활자본을 목판에 번각한 목판 번각본 중 4권(삼성본, 반야사본, 대구본, 공인본)이 현전하고 있으며, 현전하는 번각본 들은 초쇄본(원각본)이 아닌 1〜2세기 뒤의 후세 본으로 추정되며, 그 외 국립중앙도서관 일산문고 소장본 등, 1239년 판본 ‘증도가’와 관련된 여러 판본 들이 존재하고 있다.

 

진양공 최 이는 전란 중에 왜 시급히 각공들을 시켜 ‘증도가’ (목판)번각본을 발간하였을까? 진양공 최 이는 발문에서 “무릇 남명화상 법천이 계송한 ‘증도가’는 선문에서 가장 요긴하여 으뜸으로 요구되는 책이다. 그러므로 후학 가운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책을 바탕으로 삼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 의하여 참선하는 사람들이 삼매의 경지로 몰입하여, 드디어 그 진리(참선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래가 끊겨 유통되지 않는다. 이에 나(최이)는 각공들을 모집하여…”라고 설명했다.

 

즉, 으뜸으로 요구되는 책인 ‘증도가’를 목판으로 다량 발간하여 한반도 전역의 주요 사찰(수선사, 백련사 계통)에 배포함으로서, 불교계의 지지를 획득하여 지지기반을 더욱 굳건히 확보하기 위해 시급히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 (자료2) 증도가 발간 최 이의 발문 등(증도가자와 고려시대 금속활자 118p)


‘증도가’(번각본)발간은 민심수습 및 대몽항쟁을 위한 국가 정책의 일환

 시대를 초월, 조선 중엽까지 꾸준히 번각(각기 다른 제목의 여러 판본 존재) 

 

살펴 본 바와 같이, ‘증도가’ 금속 활자본은 1232년 이전 개경에서 발간되었으며, (목판)번각본은 몽고와의 전란 중인 1239년 당시 지배층 및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던 수선사 및 백련사 등 불교계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무신정권의 지배자였던 진양공 최 이가 불교 도량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증도가’를 (목판)번각본으로 다량 발간했다. 

 

즉, 최 이는 대몽항쟁 및 국가수호를 위해 수선사 결사를 비롯한 백련사 결사 등을 민족정신의 구심점으로 삼고, 이와 동시에 몽고침입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복원하는 ‘재조(팔만)대장경 완성’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국론을 결집시켜 나갔으며, 이런 과정에서 ‘남명송증도가’의 (목판)번각본을 발간한 것이다.

 

일부 연구가들에 의해 1166년 출생으로 알려진 진양공 최 이는 1212〜2013년경 두 아들 만종, 만덕(1248년 환속, 항으로 개명. 1249년 집권)을 혜심의 제자로 삭발 출가시킨다. 아들 둘을 불가에 출가시킨 최 이로서는 불교계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계에서 진정 필요한 ‘증도가’ (활자)인쇄를 결심, 발간하였을 것이란 점은 충분히 추론된다(금속활자로 증도가 및 상정예문을 발간하였음은 이미 기록으로 증명된 상황임). 

 

이런 상황에서 몽고와의 전란이 발생함에 따라 강화로 천도하였고, 전란 중에 국론결집이 절실한 상황에서 불교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주자본의 전래(傳來)가 끊긴 ‘증도가’를 1239년 각수 11명을 모아 목판본으로 번각(최 이의 발문)하여 수선사, 백련사, 해인사 등 전국 주요사찰 등에 두루 내려 보냈을 것은 자명하다. 이로 인해 수선사 3대 사주인 몽 여 등 불교계 지도자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증도가’ 금속 활자본   및 (목판)번각본 발간은 국가 (중점)시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증도가’의 최 이 발문 및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신인상정례문발미대진양공행에서 ‘증도가’ 및 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발간한 것이 증명되며, 금속 활자본 ‘증도가’를 목판으로 번각한 서책 중 4권(삼성본, 공인본, 반야사본, 대구본)은 현존하고 있으며, 위 4권 모두 같은 판에서 인출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중 2건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삼성본, 공인본), 1건은 현재 지정과정 중에 있다(반야사본). 그 가운데 3건에는 후대에 기입한 묵서구결이 남아 있다. 그 외 1239년 판본 ‘증도가’와 관련된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같은 판에서 인출된 것으로 보이는 4종(삼성본, 공인본, 반야사본, 대구본)의 (목판)번각본 외, 10여 종의 각종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국립중앙박물관 일산문고 소장본은 1239년 판본의 어느 시기 인출본을 그대로 모사하여 판목에다 새로 새긴 모사본으로 보이며, 2)1089년 간행된 간행 된 영가진각대사증도가의 을해년 번각본(정거 주석본), 3)고려대학교 대학원 소장본(1424년 고창 문수사), 4)종로도서관 소장본(1526년 황해도 심원사에서 중간), 5)무계 고려본(법천 주석본), 6)유계 고려본(법천 주석본. 한국학중앙연구원), 7)1424년(세종 6년)(법천 주석본. 남명천송영가증도가서), 8)1455년(세조1)(언기 주석본), 9)1457년(세조3년)(영가진각선사증도가주해), 10)1460년(세조6년)(법천 주석본), 11)1472년(성종3년)(법천 주석본), 12)1482년 (성종13년)(법천 주석본), 13)1526년(중종21년)(황해도 심원사에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개판), 14)1574년(선조7년)(언기 주석본. 영가진각대사증도가), 15)1576년(선조9년)(법천 주석본. 용인 서봉사) 발간 판본 등이다.

 

이렇듯 당나라 영가의 현각선사(665〜713)가 남종선의 시조인 6조 혜능(慧能)을 만난 후 하룻밤 사이에 얻은 큰 깨달음을 고시체(古時體)로 읊은 ‘증도가’는 1076년 절강성의 괄창(지금의 절강성 여수)에서 목판으로 찍어낸 후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선문에서 가장 요긴하여 으뜸으로 요구되는 책으로 인식되어 1232년 이전 금속활자본 발간에서부터 1239년 다량의 (목판)번각본 발간을 거쳐 조선조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각기 다른 제목 등으로 (목판)번각되었다. 

 

고려금속활자의 번각본인 ‘남명천화상증도가’의 형태서지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현존 4종의 번각본은 1239년 초쇄본(원각본)이 아닌 후쇄본으로 보이며, 특히 대구본은 인수대비의 발원으로 1472년경으로 추정된다. 관련된 판본으로 서명을 달리하거나 법천과 언기 등 주석자가 다른 판본도 조선시대에 발간, 유통되었다. 특히 조맹부의 글씨로 된 판본은 탁본으로 많이 유통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239년 본(초쇄본)을 저본으로 중간하거나 (재)번각한 판본도 2종 이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선문에서 가장 요긴한 ‘증도가’는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꾸준히 번각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누구나 참선수행을 하면 부처의 본체를 깨달을 수 있다는 선(禪)의 진수를 노래한 ‘증도가’ 발간은 최 이 정권의 민심수습용 방패이자, 대몽항쟁을 위한 호국이념 실현의 주요 수단이었다. 이렇듯 ‘증도가’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이런 연유로 최 이는 개경정부에서 ‘증도가’를 활자본으로 발간했고, 천도 (1232년)후 각수들을 동원하여 (목판)번각케 하여 주요사찰 등에 내려 보냈다.

 

▲ (자료3) 증도가자와 증도가(번각본) (자료제공= 다보성갤러리)


활자(본)와 번각본의 실제적 차이 등을 고려한다면 동일 글자임이 분명

위조가능성 전무. 화염 속에 던져져버린 증도가자…인류시원의 활자 규명해야 

 

살펴본 바와 같이, ‘증도가’ 발간은 최 이 정권의 민심수습용 방패이자, 대몽항쟁을 위한 호국이념 실현의 주요 수단으로서 이를 위해 최 이는 개경정부에서 금속 활자본을, 천도 후 강화정부에선 (목판)번각본을 발간했다. 그렇지만 금속활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2010년 9월 ‘증도가’를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가 다량 발견되어 관심을 집중시켰음은 알려진 바와 같다.

 

신청활자가 ‘증도가’를 찍은 금속활자가 맞는다면 인류시원의 금속활자로서 세계 금속활자의 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세계적 대사건인 것이다. 이런 연유로 진·위 논쟁과 진실규명 과정은 격렬하였고, 6년에 걸친 탄소연대측정 및 각종 진위 과학 분석 등을 통한 진·위 규명의 결과 ‘... 고려활자일 가능성은 있으나 (문화재)가치 없다’였고, 이런 (부결)결과는 도리어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신청활자의 세계사적 위치는 막중하기에 문화재청의 부결결정이 합리적 근거가 있으며,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는지 냉정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활자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신청활자와 (목판)번각본을 비교분석하는 수밖에 없다. 활자본과 번각본의 차이점 등을 입체적으로 고찰하면서 말이다.

    

번각 시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을 우선 살펴보면, 각수에 따라 글자체를 임의로 고쳐 새기는 경우가 나타나거나, 가로, 세로획의 교차부분에 각도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각수나 외부 요인 등으로 판식(변란, 흑구, 어미)의 모양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참여각수를 판면 등에 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본(활자본)에 비해 시간의 경과에 따른 번각 판의 물리적 현상들로서는, 1) 목재수축으로 인한 판의 축소현상, 2) 판면과 글자의 마손에 따른 목리의 노출, 3) 인출 빈도와 보존상태에 따른 탈획, 끊어짐, 4) 인출 빈도에 따라 점차 획이 굵어지고, 획의 가장자리에 마모가 심해 선명도가 낮아지거나, 5) 각수에 따라 저본과 다른 글자의 굵기나 도각의 방향 등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번각본 인출 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는, 먹의 도포가 고르지 않아 먹색의 농담이 달라지거나, 먹이 한 글자내의 획 사이에 뭉쳐지거나 고였다가 인출 시 글자와 함께 묻어나기도 하거나, 인출 시의 흔들림이나 종이가 늘어나기도 한다. 인출 시 덮은 종이를 문질러내는 시간, 압력 등에 따라 획의 정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종이 재료 및 신축정도에 따라 인명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렇듯 저본(활자본)과 (목판)번각본은 많은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수많은 차이점들 중 핵심사항은 목재의 수축률에 따른 번각본의 수축이다. 저본에 비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통상 5〜8%정도 (세로)수축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은 목재연구가들의 오랜 연구결과이며, 수많은 증거(문헌)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다. 

 

▲ (자료4) (세로)수축률 차이를 보이는 각종 증거(문헌) (2020. 고려-조선 금속활자 판본 검토 112〜113p)

 
저본(활자본)을 목판으로 번각하고, 이를 인출할 때 발생하는 위와 같은 현상들에 근거하여 활자본이 존재하지 않는 신청활자와 현전하는 (목판)번각본과의 비교분석을 통한 같은 활자임을 규명하는 것이 사안의 핵심이다. 일단 문화재청은 국과수의 서체분석, 주조·조판실험 및 소장경위 등을 근거로 ‘증도가’를 찍은 같은 활자임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면서 문화재 지정을 부결했다.

 

이러한 문화재청의 결론에 대해 소장자 및 기초학술조사연구팀은 강력 반발하였고, 국회의 개입으로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그렇다면 신청활자가 ‘증도가’를 찍은 활자인지, 아닌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증명할지가 사안의 핵심인 것이다. 특히, 이 사안은 인류의 금속활자 시원을 규명하는 중대 문제이기에 더욱 입체적이면서도 세밀한 분석(고찰)이 요구된다.

 

우선 관계당국의 (부결)결론은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결론이 아니라, 근거를 찾지 못해 소장자를 핑계로 (부결)결론지은 추정에 불과한 엉터리(?) 결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적 증거능력이 부여되는 탄소연대측정 및 각종 과학감정 결론을 외면(부정)하고, 연구영역에 불과한 서체비교와 일방적으로 진행한 주조·조판실험을 과학으로 포장하고, 소장자를 앞세운 점이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신청활자와 ‘증도가’번각본의 같은 활자임을 어떻게 증명해야 된단 말인가? 이는 실로 지난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시대상황에 대한 입체적 분석과 제반 상황을 엄밀히 분석하면 동일 활자 증명은 충분히 가능하다.

 

선(禪)의 진수를 노래한 ‘증도가’를 개경정부에서 금속 활자본으로, 강화천도(1232)후 목판으로 번각한 사실은 문헌(사료)으로 증명되었기에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다. 더하여 상정예문도 금속활자로 발간(1234〜1241)한 점도 증명되었다. 이로서 1230년대까지 수많은 금속활자를 제작한 점은 증명된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당시(1230년대)의 위조활자 제작가능성과, 근간의 위조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 시대에 위조활자를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현대에서 (위조)활자를 제작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4권뿐인 ‘증도가’ 번각본 입수가 불가능하기에 위조활자 제작 역시 불가능하다.

 

각종 사료들을 통해 그 시대 수많은 활자들을 제작하였음이 증명되어진 상태다. 그렇다면 2010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신청활자(일명 ‘증도가자’)와 ‘증도가’ 번각본이 같은 글씨임을 규명하는 무엇보다 우선이다. 솔직히 그 시대의 활자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며, 누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 제작했단 말인가? 

 

이런 측면에서 살펴보면, 신청활자가 위조되었을 가능성은 전무 하고, 활자 및 저본(활자본)과 번각본의 본질적 차이 등을 고려한다면 신청활자와 번각본 글씨가 같은 글씨임이 유력한 상황이다. 특히, 그 시대의 독특한 고서체, 약자, 이체자 등을 어떻게 알고 위조한단 말인가? 이는 누구나 인정해야하는 상식이다. 그러므로 신청활자 38종 52자로 찍어낸 1,385자를 전부 추출, 정밀분석(유사도·중첩도)하면 신청활자와 번각본 서체가 동일한 것임이 밝혀질 것이다.

 

누구나 참선수행을 하면 부처의 본체를 깨달을 수 있다는 선(禪)의 진수를 노래한 ‘증도가’ 발간은 고려 무신정권 지배자인 최 이 정권의 호국이념 실현의 주요 수단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번각되었음이 각종 사료(문헌)로 증명된다. 이렇듯 ‘증도가’는 시대를 초월하여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토록 중요한 ‘증도가’를 찍은 금속활자가 나타났고, 각종 고증(탄소연대측정, 각종 과학감정)결과 위조 흔적 없는 고려활자임이 밝혀졌고, 더하여 활자와 번각본의 실제적 차이 등을 고려한다면 동일 글자임이 넉넉히 증명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관계당국은 일방적인 실험과 근거 없는 각종 가설 앞에서 ‘문화재 가치 없다’면서 화염 속으로 던져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류의 금속활자 시원을 밝혀내는 여정을 멈출 순 없다.  (계속)

 

▲ (자료5) 남북 공동 발굴한 고려금속활자 단(전) (2015.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언론 제공)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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