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 칼럼] 영혼의 고독한 울림

강인 | 기사입력 2023/06/05 [11:56]

[강인 칼럼] 영혼의 고독한 울림

강인 | 입력 : 2023/06/05 [11:56]

현대소설의 한 유형으로서  '앙티로망(Anti Roman, 反小說)‘또는 '누보로망(Nouveau Roman, 新小說,)’이라 불리는 문학적 경향이 있다. 

 

이 ‘앙티로망’이라는 용어는 ‘장 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가 ‘나탈리 샤로트(Nathalie Sarraute)’의 소설  [낯선 사람의 초상(Portrait d'un Inconnu)]의 서문에서처음으로 사용한 것인데, 전통적인소설기법에서 사용되는 일정한 플롯과 스토리가 파괴되거나 해체되고 그저 화자(話者)나 객관적인 관찰자의 관점만이 덩그러니 남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내용의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나 행동에도 작가의 의도나 계획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인물이 행동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문체도 현재형으로 되어 있으며문장의 의미 자체도 두텁지 못하고 그 울림마저 공허하기만 하다. 

 

주로 프랑스 문인들이 대표작가인데 1950년대 기존의 전통적 소설 창작 기법에 반기를 들고 ‘누보로망’을 개척한 '알랭 로브 그리에(Alain Robbe–Grillet)‘, '나탈리 샤로트(Nathalie Sarraute)’, 1985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끌로드 시몽(Claude Simon)‘ 그리고 ’마르그리뜨 뒤라스(Marguerite Duras)‘ 등이 생각난다.

 

그런데 필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앙티로망’이나 ‘누보로망’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왜 이런 무미건조한 소설 양식이 생겨났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기존 양식의 해체를 시도하려고 했다는  실험정신과  그러한 양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 규정하는 데에  유효 적절하다는 일반적인 논리도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현대인들의 삶의 양상이 결코 기존의 가치로 고정되어 있던 윤리관이나 도덕관 그리고 신을 바라보는 종교의 인식으로 인도되어지거나 해독될 수 없다는 정신적 탈 궤도, 또는 주변으로의 소외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인들의 삶이 어떤 방식과 모습으로 살아야  가장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고 조언하거나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각양각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그들의 삶을 재단(裁斷)하거나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쳐 본들 그 외치고 있는 시간에도 우리의 주변 어느 곳에서는  절도와 폭력과 뇌물, 강간, 사기, 배신, 거짓이  횡행(橫行)하고 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으로서의 사실이며 또한 외면할 수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비록 뒤틀리고 잘못되었을지라도 삶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것이고  올바르든 뒤틀렸든 그들의 삶도 삶의 한 형태로 인정하는 데서 이 같은 소설 양식의 접근 방식이 시작된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외로운 이야기다. 

 

이렇듯 앙티로망(누보로망)은 무의미하고 무가치로운 일상생활을 되풀이해야 하는 현대인의 건조하고 고독한 삶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도, 강간, 살인 등의 범죄자도 당당히 존재 이유가 설정되는 저 유럽의 판단에 비해  아직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소설 풍토나,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독서계가 그나마 미개한 대로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어쩌면 곧 우리도 그런 사고방식이 보편화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현시대의 삶이 외롭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 뤽 올리비에 메르송 작 [물 한방울] 1903년, 빅토르 위고 미술관 소장. '에스메랄다'가 묶여있는 '콰지모도'에게 물을 먹여주는 모습

 

[영혼의 고독한 울림],  울림이 없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의 오페라 [노틀담 'Notre Dame']의 ’간주곡(Intermezzo)'은 그들을 위하여 물기 배인 촉촉한 음향을 안개처럼 뿜어주는 듯하다. 

 

1874년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나1939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뜬프란츠 슈미트는 2곡의 오페라, 1곡의 오라토리오,  그리고  4곡의 교향곡과 다수의 실내악곡 등을  일생의 작품으로 남기고 있다. 

 

그중 대다수의 작품들은 거의 잊혀지고 오늘날에는 그의 오페라 ’노틀담의 간주곡‘만이 현세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어 일깨워 주고있다. 

 

오페라 ’노틀담‘은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작가인'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소설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Dame)](원제는 프랑스어로 ‘파리의 노틀담(Notre-dame de Paris)’를 기초로 하여 작곡한 것으로 노틀담 성당의 종지기인 꼽추 '콰지모도(Quasimodo)'가 아름다운 집시여인 '에스메랄다(Esmeralda)'를 만나 벌이는 가슴 저미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여기서 ’간주곡‘은 여주인공 ’에스메랄다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이 ’노틀담의 꼽추‘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므로 전체 내용의 설명은 생략하고 끝부분만 설명한다면 결국 에스메랄다는 군대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되고 죽은 채로 다시 한번 교수형에 처해진다.  죽은 에스메랄다는 어느 동굴에 버려지고 콰지모도는 그녀를 찾아가서 그 옆에 누운 채 같이 죽음을 맞이한다.그 후 2년이지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부등켜 안고 있는 두 개의 유골을 발견한다. 그 유골들을 떼어놓으려 하자 곧 먼지로 변하고 만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인가?

 

필자는 비록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남은 생애 이러한 사랑을 실현해보고 싶은 것이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이들의 순애보(殉愛譜)를 접하노라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성적(性的) 타락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는 차치하고, 예컨대 2017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되어 한국에 상륙한 ‘Me Too’운동의 물결은 한 여성 검사의 고발에서 점차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심지어는 이러한 사회적 비리 방지에 앞장서야 할 종교계와 문화예술계에까지 밀려와 어느새 쓰나미가 되어 사회 전 분야를 휩쓸고 지나갔다. 안타까운 것은 필자도 아는바 그동안 음악계 일부 유명 연주자, 교수들이 벌여온 성적 추행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지금도 잠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조건이나 목적, 그리고 충동에 의해 고귀한 사랑을 추악하게 만드는 인간쓰레기들이 만연한 시대.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비인간적인 현대 문학사조로 볼 때, 현세뿐 아니라 내세까지 이어진 미모의 에스메랄다 와 꼽추 콰지모도의 사랑은 순수함을 넘어 향기롭기까지 하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 외부필진의 기고 ,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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