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印度)를 꿈꾸는 여류시인 김양식

최재원기자 | 기사입력 2008/04/02 [07:35]

인도(印度)를 꿈꾸는 여류시인 김양식

최재원기자 | 입력 : 2008/04/02 [07:35]
↑ 김양식시인이 가장 아끼는 인도 인형 ⓒ최재원기자
 
인도(印度)를 꿈꾸는 원로 여류시인
 
193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를 졸업한 김양식 시인은 누가 뭐래도 한국의 원로 여류 시인이다. 천성이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조용한 성격이다 보니 그 이름이 그렇게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시 한 귀절 하나하나에 짙은 민족애와 나라 사랑, 그리고 약자에 대한 서글픔의 대변인 역할을 평생토록 해낸 시인 김양식, 팔순이 내일모레지만 아직도 목소리에 느껴지는 모던함이 그녀를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숙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10세 때부터 시를 썼어요. 그때는 일제 강점기였는데 그 당시 큰 오빠가 경복중학교에 다녔어요. 그 오빠가 시를 잘 썼어요." 하면서 시력(詩歷)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 당시는 모든 교과서가 일본말로 되어 있어서 시에 관한 전문적인 책이 드물었을 때였다고 한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조선문고라는 조그만 문학 모음집이었는데 거기에 김안서, 정지용 선생의 글이 실려 있어서 유심히 들여다 보고 시에 대한 첫눈을 떴다고 한다.

" 그 당시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초승달"이란 시집을 냈는데 거기에 제가 함몰됐어요."
하면서 인도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것은 훗날 김양식 시인이 인도라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에 대해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매우 도움이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초승달의 내용은 타고르가 부인을 일찍 여의고(1902년)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간직했던 사랑의 이야기를 쓴 것이었어요. 너무나도 그 내용이 아름답고 형이상학적인 부드러움이 있어서 지금까지 시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지요."
그리고 조금 더 세월이 흘러서 소학교(당시)시절, 작문 시간에 시를 써냈는데 당시 일본인 선생이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참으로 잘 쓴 시라면서 칠판에 그 시를 한 달 동안 써서 붙여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자작시를 남송 하는 시간이면 으레 그녀가 대표 낭송 가로 뽑혀서 낭송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외국어를 좋아해서 영시라든가 독일어로 된 시를 낭송했어요."

© 최재원기자
 
동란 때 피란 시절 부산에서

민족상잔의 6.25가 발발하자 이화여대에 다니던 김양식 시인은 부산 임시 교사를 가서 거기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탈환 후 환도해서 그 학교 영문과를 졸업, 이때는 주로 영시를 전문으로 연구했으나 이후부터 본격적인 시 작업에 들어가서 시인으로서의 일생을 보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제나 지금이나 하루 평균 5시간 정도 잠을 자고 깨어서는 어떤 시를 쓸까? 항상 생각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지요. 이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시를 쓴 것입니다."
 
지금 김양식 시인이 쓴 시는 그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그렇게 다작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 한 편의 시에서는 그녀 나름대로 강한 이미지를 담아 선을 보여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 쓴 시들이 합치면 모두 1천5백 수나 아니면 2천 수정도 될 거에요. 그 가운데 장편 서사시도 있어요." 하면서 임진왜란 당시의 한 아낙네의 절개와 우리 민족의 아픔을 그린 "은장도여! 은장도여"가 있다.

그것은 일본인들의 무례한 침입으로 고통당한 우리 선조의 애끓는 민족적인 아픔을 대변한 장편 서사시였다. 일본이란 나라는 특히 시인이나 소설가 가운데 이른바 우국적(憂國的)인 작품을 많이 발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동경 지사로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眞太郞)나 70년대 자위대 창설을 주장하면서 할복 자결한 금강사(金閣寺)의 작가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같은 사람들은 일본 정신을 강조하면서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런 경향에 대해 김양식 시인은 "은장도여 은장도여! 하는 시로 우리 민족의 애환을 그린 서사시로 답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우국이란 우리에게는 아픔 그 자체라는 것이다.

"뒤늦은 나이에 등단"

▲ 김양식 시인이 운영하는 갤러리 'shanti'  © 최재원기자
"시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만족하고 싶었어요. 문단에 등단한다는 것이 제게는 마땅한 것 같지가 않았지요. 제가 쓴 시가 책이 되어 나오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과의 교감을 통하면 되지 굳이 등단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작품을 읽어본 미당 서정주 선생이 깜짝 놀라면서 이런 좋은 시를 갖고 등단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등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1969년에 월간문학 창간호에 개재된 "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란 작품이었다.
이후 여러 권의 시집을 냈다. 정읍 후사(井邑後詞),초이시집(初荑詩集) 새들의 해돋이,숫고양이 한마리 등등이다.
"문단에 일찍 나와서 여러 직책을 맡다 보면 시간이 없어서 시를 쓰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뒤늦게 나온 것이 어쩌면 행운이지요." 하면서 조용한 성품의 일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 그녀의 초기 시는 주로 규방시(閨房詩)였는데 규방시란 아녀자들의 일상과 생활에서 오는 소탈한 이야기를 그린 시로 흔히 여류시인들이 소재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가 무엇인지 알게 된 후부터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외국에 나갔을 때 그쪽 시인들이 현실 참여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시가 국민의 아픔을 대신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 그녀의 시는 궤(軌)를 달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76년도에 있던 세계 시인대회에서 그녀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 어느 노 시인이 대학강의실에서 시 낭송회를 하는데 저명인사들을 비롯한 교수들이 의자가 모자라서 바닥에 앉아 그 노 시인의 시를 경청하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시인을 초대하여 한국에서 시낭송회를 갖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시인의 열성은 대단했어요. 나약한 소재가 아니라 강렬한 민족에의 아픔과 약자에 대한 대변자로서의 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독재정권 시절 "가로수“란 시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가로수에 매달려 우는 매미는 최루탄 냄새를 맡고 그렇게 우는데 사람들은 무엇 하고 있는가 하는 암시적인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장편 서사시 "은장도여! 은장도여!"는 일본어와 중국어로도 번역이 되었어요"

인도에로의 긴 여행

© 최재원기자
김양식 시인은 현재 인도문화원 원장으로 있다. 감시인이 인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동기가 있다. 인도는 총체적으로 그녀에게 있어서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그 넓고 광활한 나라의 수많은 사람 모두가 한결같이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것도 그렇고 삶을 초탈한 그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가 철학가들이라는 것이다. "75년도에 인도에서 아시아 시인대회를 개최했어요. 그때 인도를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웬일인지 자꾸만 눈물이 나는 감동이 왔어요."

감시인은 자신이 시인으로서 존재가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인도의 말 없는 침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누구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누가 아파도 누가 고통을 받아도 무관심으로 일관해요. 왜냐하면, 내세를 믿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철학자 같고 사람들의 얼굴에 평화가 깃들어 있어요. 영국이 결국 인도를 차지하지 못한 원인이 그 비협조적인 무관심 때문인 것 같았어요." 하면서 자신의 인도에서의 첫 체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인도에서 돌아오고 나서 감시인은 약 6개월 동안 몸이 아파 누워있었다고 한다. 너무나도 큰 문화적 충격이 그녀의 폐부를 짓 눌럿기 때문이다. 6개월이 지나서 그녀는 그제야 인도에 대한 글, 기행문을 비롯한 인도 수필집, 시 등을 발표했고 뒤늦게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나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는데 장학금을 타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웃는다. "재단에 돈이 없다고 해요"

하늘과 땅, 그리고 삶과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체이기도 한 인도, 거기 사는 사람들은 신(神)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모두가 신이지요." 배고파서 죽어가도 누구 하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절대적인 무관심, 그래서 불안함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도를 그녀는 마음의 고향으로 알고 있다. 그래선지 인도 정부에서 내린 훈장을 수여했다. 그녀는 인도의 석학들을 모셔서 강연을 하기도 했고 인도의 모든 것을 알려서 인도가 어떤 잠재적인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설득하려 하고 있다.

▲  인도 갤러리 'shanti' 의 작품 中  [ subrata mete oilon canvas 60x60 "lover" ]  © 최재원기자
 
시인은 무엇인가.

"예전에는 시 하나만 갖고 논하지 않았어요. 시서화(詩書畵)라고 했어요. 즉 시와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우러져서 하나의 작품이 되지요. 시만 쓴다고 시인이 아니라 시와 연관된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하나 덧붙이고 싶어요. "그녀의 주장인즉 여기에 가무(歌舞)가 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군자를 치고 그 위에 시를 쓰고 글을 쓰는 것은 시의 전체 작품을 완성하는 척도라고 했다.
노래와 춤과 그림과 글, 그리고 시가 어우러지는 한판의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프랑스 처럼 토론을 통해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토론을 통해서 인격적인 성숙함에 이르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화적 완성이라고 했다.

나이가 그렇게 들었어도 김양식 시인에게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다.
"서초동 산자락 이 층에 있을 때 저를 찾아오려고 광화문 지하도에서 넘어지셨어요. 어머니는 동부 이촌동에 사셨지요. 그때 멍든 다리에 약을 발라주면서 어머니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하고 말하니 아무 말도 하시지 않으세요." 그 어머니가 당시 88세 셨다는 것이다. 그 어머니는 작고한 아버지의 친구가 그린 물동이를 이고 가는 그림을 보면서 젊은 시절을 회상하셨는데 그것이 마음이 걸린다고 했다.

아무튼, 원로 여류시인이, 그것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여류시인이 드문 우리 문단에 김양식 시인은 많은 문학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 아닐 수가 없다.                                                                                                             
 
시성詩聖 타고르님께 띄운 편지
 
                                               김양식
 
나는 당신을 위하여 노래 부릅니다
사랑과 슬픔과 때론 절망의 노래를
당신이 부르시던 그 가락에 맞추어
나는 당신을 위하여 노래 부릅니다
 
아주 오래 전,
열살이란 어린 소녀로 내가 자랐을 때
멀리서 아주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당신의 신비로운 음률을 들었습니다
 
어린 소녀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했고
당신이 태어난 그 땅의 따사로운 봄바람은
눈부신 오색의 햇살과 향기를 보듬고
내 창가로 찾아와 가만히 노크했습니다
 
"누구십니까?
햇살과 향기를 가득히 안고 오신
백발의 허리 굽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소녀여,
뜰에는 온통 향기로운 망고 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황금빛 감미로운 열매 익고
바닷가 야자수 나무 시원한 초록 잎들이
바람결에 서로 부딪치며 사운대는
그런 신비로운 땅으로 오리라, 소녀여-"
 
그러나
내가 태어나서 자란 조국은 이미
참으로 무례한 침입자의 오만과 학정으로
무서운 재앙 되어 이 땅을 휩쓸어
조국은 캄캄한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절망은 무서운 해일이 되어 넘실거렸으니
이 땅은 온통 분노와 비탄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러나 1929년 3월 28일
당신이 일본 요코하마항을 출발하기전 직전,
나라 잃고 신음하는 korea를 위하여
당신은 다만 4행의 짤막한 시 한 수을
눈물로 환송하는 한국 청년들 손에 쥐어주고
냉대하는 일본을 뒤로 황급히 떠났습니다
 
비록 당신의 목소리는 짧고 낮았으나
당신 가슴 깊이에서 터져나는 정의의 외침은
머지않아 찾아올 우리의 광복을 예언했습니다
그렇게도 갈망하던 우리의 독립을 예언했습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당신의 굳은 신념은
불꽃으로 활활 타오를 우리 조국의 소생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대양의 밀물 되어
힘차게 힘차게 출렁이게 했습니다.
 
당신이 불러주신 노래 <동방의 등불>은
학대받고 신음하는 우리 백이민족 귓가에
가까이 아주 가까이 들려왔습니다
 
[일즉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
빗나든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비치 되리라]
 
당신이 불러주신 이 예언의 노래는
그대로가 당신의 깊은 연민이고 사랑이었습니다
그대로가 당신의 뜨거운 격려이고 믿음이었습니다
 
언제나
아끼서던 당신 방 낡은 의자에 기대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시던 당신 곁에서
하늘의 눈썹 같은 초승달 바라보며
나는 당신의 소박하고 겸손한
아주 작은 보랏빛 오랑캐꽃으로 자랐습니다
 
때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이 고인 샘물을 길어 올려
내 여린 마음의 아픈 갈증을 치유하고
숲 속의 산들바람처럼 청정케 했습니다
 
당신의 끝없이 깊은 사랑은
내 영혼의 평화와 풍요로움이었으며
내 삶의 값진 자양이었습니다
 
이제 그 소녀는 이만큼 자라서
우아한 가락의 비파를 켜며
우주의 사랑과 평화를 노래합니다
영원한 진리의 참뜻을 노래합니다
 
새로 맞는 또 한 번의 천년에도
당신께서 희구하신 온 인류에의 사랑과 평화를
아주 가만한 목소리로 오래고 오랜동안
나는 당신을 따라 노래하렵니다
 
인터뷰 / 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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