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고 가며
눈 감고 있는 것 같지만,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졸고 있는 것 같지만.... 경로석의 저 노인이, 임산부 배려석의 저 여인이, 노조원 유니폼의 더벅머리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 같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선 노랑머리도 뜯어진 청바지도 성경책도, 넥타이도 모조품 GUCCI 백도 같은 칸에 실려 같은 쪽으로 가고 있지만 저들 중 누군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 같다 너는 어느 편이냐 소리치며 달려와 멱살을 잡을 것 같다.
#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모임 때문에 지하철을 탔는데, 서늘한 냉기가 느껴진 것은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려 조심하며, 흔들거리는 손잡이를 꽉 잡고 균형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다음 역을 향해 빠르게 굴러가는 전동차의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경로석의 저 노인이,/임산부 배려석의/저 여인이,/노조원 유니폼의 더벅머리가/의심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선/노랑머리도/뜯어진 청바지도/성경책도, 넥타이도/모조품 GUCCI 백도/같은 칸에 실려/같은 쪽으로 가고 있지만/저들 중 누군가가 자리를 박차고/일어”서서 “너는 어느 편이냐/소리치며 달려와/멱살을 잡을 것 같”은 두려움이 스멀거렸던 것은 내가 예민한 탓이었을까?
‘우리편 편향(myside bias)’이 무서울 정도로 작동되는 시절이기 때문일까. 개인의 다양한 의견은 들리지 않고, ‘내용에 기반한 편향’의 집단 목소리만 들린다. 사회 지도층인 엘리트들의 ‘우리편 편향’도 보통 사람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로는 ‘가치관의 차이를 무지로 탈바꿈시킨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의 이슈에 대해 다른 여러 개의 가치관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쪽에 비중을 둘 것인가에서 드러나는 정당한 차이를 ‘무지의 소치’로 매도 해버리는 집단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보인다. 논쟁이 되는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편 편향’으로만 대처한다면, 분열된 마음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우리편 편향’으로 작동되는 인지적 착각을 깨닫고,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를 의심해 보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편 편향’을 작동시키는 것은 확신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특정 목적을 가진 조직의 성향에 의해 만들어진 프레임일 수도 있다.
심리학자인 스타노비치(Keith E. Stanovich)는 새로운 이슈를 만나게 되면, 기껏해야 균일하지 않은 사전 확률을 지닌 ‘검증 가능 신념’으로 여기라고 권한다. 과학적 검증을 위해 스스로 공부하고, 찾아다니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하기보다는 타인이나 매스컴이 전하는 내용을 안이하게 받아들이려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ter)’가 작동되는 우리의 뇌 구조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보편적 사고에서 드러난 ‘우리편 편향’이 ‘확신’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고 성찰할 수 있으리라.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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