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가을을 밀고 가는 울음 / 이관묵

서대선 | 기사입력 2024/11/11 [05:58]

[이 아침의 시] 가을을 밀고 가는 울음 / 이관묵

서대선 | 입력 : 2024/11/11 [05:58]

가을을 밀고 가는 울음

 

   해인사 홍류동 골짜기 몇몇 큰 바위들은 몸에 한 사람씩

이름들을 새겼다 아마 어느 왕조의 끝자락을 힘겹게 건너다

가 스스로 바위에 빠져 죽은 자들이리라  시문이  능했거나

가락이 울컥했거나  아무튼 돌도 자신에게 출가한 어떤  한

사람의 마음만은 속 깊이 묻어 가꾸고 싶었던 거다 돌로 태

어나 일생을 한 사람만을 외우며 산 저 독음獨音!

 

  바위도 식은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걷던 길을 잠시 불러

들이긴 했으나 자신의 바닥에 눌러 앉힌 한 사람을 다시 바

위로 가르치기까지 얼마나 더뎠겠는가 보아라 어떤 한 사람

에게 다다르는 느리고 더딘 먼 길이  바위에서 두런두런 흘

러나와 다시 바위로 되돌아가는 저 뒷짐을, 가을을 밀고 가는

쇠기러기 울음을

 

# 왜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걸까?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것을 ‘각자(刻字)’ 또는 ‘암각(巖刻)’이라 한다. 이런 풍습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성행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선비의 山水文化로 자리 잡기도 했다. 오늘날도 명승지나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의 근처 석벽이나 바위에 사람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탁명(托名)’이라 하는데, 옛날 사람들은 가문의 번창을 기원하거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때론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공명심(功名心)에 의한 것도 많았다. 

 

“해인사 홍류동 골짜기 몇몇 큰 바위들은 몸에 한 사람씩/이름들을 새겼다 아마 어느 왕조의 끝자락을 힘겹게 건너다/가 스스로 바위에 빠져 죽은 자들이리라”. 해인사 홍류동(紅流洞) 계곡엔 많은 이름과 글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조선 시대 홍류동은 유가(儒家)의 성지이자 시인, 묵객(墨客)들이 필수적으로 참배해야 하는 순례 성지였는데, 우리나라 문인의 시조(始祖)로 추앙받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께서 천 년 전 가야산으로 들어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선비나 관료들이 가야산을 찾아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방문 소회를 쓰거나 목판으로 새겨 해인사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1970년대 까지 홍류동 계곡 암벽을 타면서 이름을 새겨주는 직업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72년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환경보호 차원에서 바위에 각(刻)을 하는 일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20세기에도 여전히 “큰 바위들은 몸에 한 사람씩 이름을 새긴 채”, 벌레와 이끼들의 서식처가 되어 비와 바람과 천둥과 번개와 사계절의 변화를 견디고 있는 바위들을 바라보던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레 새기려 큰 바위를 골랐던 옛 선비들에게 묻고 싶어 한다. 이름이 새겨진 바위는 사람의 이름을 제 몸에 새겨 넣은 채, 과연 그 사람의 명성을 오랜 세월 떠받쳐 주고 싶었을까? “시문이 능했거나/가락이 울컥했거나 아무튼 돌도 자신에게 출가한 어떤 한/사람의 마음만은 속 깊이 묻어 가꾸고 싶었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바위도 식은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걷던 길을 잠시 불러/들이긴 했으나 자신의 바닥에 눌러 앉힌 한 사람을 다시 바/위로 가르치기까지 얼마나 더딘” 세월을 묵묵히 견디어야 할지 그 선비들은 알고 있었을까.  

 

조선 말기, 마지막 한문 四大家의 한 사람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스무 살도 되기 전 가야산 아래 해인사에 들렀을 때,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 십리 길에 펼쳐지는 절경인 홍류동을 바라보며 놀라워했는데, 바위마다 새겨져 있던 그 엄청난 이름들 앞에서 그만 입이 딱 벌어졌던 그는 ‘홍류동 산들은 옥으로 깎아놓은 병풍처럼 아름답다. 그 옥 같은 병풍에 덕지덕지 새겨진 이름들이 팔만대장경의 글자 수보다도 더 많다’고 하는 시를 ‘장난삼아 지었다’고 했다. 젊은 이건창은 자연을 훼손하면서까지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욕심을 한탄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다투어 거듭거듭 큰 글씨로 깊이 새겼지만(大書深刻競纍纍)/돌이 깨지고 이끼가 메운다면 누가 다시 알랴?(石泐苔塡誰復知)/한 글자도 쓰지 않았던 최치원은(一字不題崔致遠)/지금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칠언시를 외운다네(至今人誦七言詩)’.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도 1558년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지리산 청학동을 유람했다. 4월 19일 아침 일찍 청학동을 오르다 큰 바위에 새겨진 ‘이언경(李彦憬), 홍연(洪淵)’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호랑이도 나온다는 험하고 깊숙한 골짜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려 한 것을 보고,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나 너구리가 사는 수풀 속 돌에 이름을 새겨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아득히 날아 가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것이니, 후세 사람이 과연 무슨 새였는지 어찌 알겠는가?’라며 남명은 불편했던 심기를 표출했다. 목숨을 건 과감한 직언도 서슴지 않았고, 정치의 폐단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후학들을 길렀던 남명은 깊은 숲속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남기려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질타한 것이다. 

 

1765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했던 29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97-1801)도 천 길 벼랑과 큰 바위에 마치 묘지의 비석처럼 새겨진 이름들을 바라보며, ‘저기다 이름을 새긴 자는 대체 누구기에 석공으로 하여금 다람쥐와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한 걸까?’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명성이란 이름을 싸고도는 온갖 오해의 총체이다. 명성은 작품을 싸고돈다. 이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라던 R. M. 릴케(1875-1926)의 말씀도 죽비 같은 이 가을날, 시인은 “가을을 밀고 가는 쇠기러기 울음”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한다. 우리는 모두 저 쇠기러기처럼 이 지구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철새와 같다는 것을...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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