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관계증명서
꽃사과가 익어가는 935번 지방도 딸내미가 짰지 싶은 벨벳 모자를 쓴 할메 전동스쿠터 뒷자리에 영감을 태우고 간다 중절모를 쓴 영감 할메 어깨께 인견 블라우스 살짝 쥐고 간다 약 타러 도립병원에 간다
커브 길을 돌아 나온 덤프트럭 쌍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지나친다 잽싸게 할메 허리를 감고 찰싹 등에 붙은 영감 꼼짝하지 않는다 벨벳 모자 날아가 굴러가다 멈춘다
전동스쿠터 비상등을 켜고 후진한다 할메, 지팡이로 모자를 끌어당긴다 할메, 들어 올린 모자 잡지 못하고 다시 들어 올린다 달달 떨린다
시내버스 비상등을 켜고 멈춘다 선글라스를 끼고 내린 버스 기사 할메 벨벳 모자를 주워 씌워준다
공터에 전동스쿠터를 세운 버스 기사 할메와 영감을 부축해 태운 버스 기사 고마 걱정 붙들어 매고 있으소 이따 요기 내려줄 꼬마 룸미러로 뒷자리 바라본다
# ‘저 매미가 낳은 알이 성충이 되어 울 때도 잘 들을 수 있을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신청하고 나온 국민건강보험공단 계단 앞에서 청력이 많이 약해진 것을 은연중에 걱정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럴 수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폭우가 지나면서 깨끗해진 하늘은 어느새 가을이 어른거리는지 높고 푸르렀다.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이 초현실적인 모양으로 떠있고, 가열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낭자한데, 거리엔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반백 년을 함께한 부부의 시간이 살바돌 달리(Salvador Dali)의 그림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으로 들어가 기억의 나무 위에 걸리며, ‘태양은 뜨고 지고/태양은 뜨고 지고/세월은 빠르게 흘러가/한 계절이 지나면 다른 계절이 오네/행복과 눈물을 가득 담고서(Sunrise sunset/Sunrise sunset/Swiftly flow the days/One season following another/Laden with happiness and tears)’라는 노래 구절이 가슴 속으로 밀물졌다.
‘삶은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처럼 흔들릴 것이다(Lives would be shaky as a fiddler on the roof)’. 그러면 어떻게 지붕 위에서 균형을 잡고 바이올린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을까? 가난하지만 성실한 우유 배달꾼인 테비에는 스스로 그것은 ‘전통(Tradition)’을 지킬 때 가능하다고 자문자답한다. 살아가면서 위기를 만나면, 조상이 지켜왔던 ‘전통’적인 관습을 참조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던 선조의 지혜를 배우고, 현실 상황에 맞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록 지붕 위에서 켜는 바이올린처럼 삶이 흔들리고 위태로울지라도 균형을 잡고 아름답게 삶을 연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하는 상대를 스스로 선택하고 사랑의 표현을 감추지 않는 딸, 사이텔의 당당한 모습을 본 아버지 테비에는 얼굴도 보지 않고 중매로 결혼해서 25년을 살아온 아내 골디에게 우리는 사랑하는 걸까 하고 묻는다. 그러자 아내 골디는 남편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남편을 위해 밥을 짓고, 남편의 옷을 빨고, 집안을 돌보며, 자식을 낳고, 자식의 성장을 함께 기뻐하고,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식사할 수 있는 삶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으니 사랑이 아닐까요’라고 답한다. “혼인관계증명서”에 전통적으로 명시된 부부관계의 기본적인 삶의 강령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던 영화 속 부부의 모습이 뭉클했던 건, 이인삼각(three legged race) 경주 같은 부부의 관계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딸내미가 짰지 싶은 벨벳 모자를 쓴 할메/전동스쿠터 뒷자리에 영감을 태우고 간다/중절모를 쓴 영감 할메 어깨께 인견 블라우스/살짝 쥐고 간다 약 타러 도립병원에 간다”는 구절 속에는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듯 수십 년을 함께 살아낸 노부부의 모습이 정겹고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딸이 짜준 모자를 쓴 할머니의 모습 속에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딸의 모습이 보인다. 병든 남편을 위해 전동스쿠터 운전을 배운 아내의 사랑도 보인다. 전동스쿠터 뒤에 앉아서 운전하는 아내의 “인견 블라우스”를 살짝 쥔 할아버지의 모습에선 가부장적인 꼰대의 모습이 아니라, 아내의 보살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병원 가는 길에 “쌍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위협적으로 지나치는 “덤프트럭”도 있지만, “비상등”까지 켜고 멈춘 친절한 “버스기사”가 땅에 떨어진 “벨벳 모자”를 주워 할머니에게 씌워줄 뿐만 아니라, “공터에 전동스쿠터를 세운 버스 기사/할메와 영감을 부축해 태운 버스 기사”는 걱정하는 노부부에게 “고마 걱정 붙들어 매고 있으소”라고 안심시켜 드린다. 우리의 삶의 길에도 덤프트럭의 위협 같은 상황도 만나겠지만,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고,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과 함께하는 삶이라면, ‘지붕 위에서 켜는 바이올린’처럼 위태롭고 흔들릴 때가 있을지라도 균형을 잡으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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