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노트] 잊힌 한국 소설의 특별한 귀환, '엔드리스 시리즈'

출판 기획자 은현희 주간이 소개하는 구간 한국 문학의 가치

오현성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4/08/20 [14:28]

[출판인노트] 잊힌 한국 소설의 특별한 귀환, '엔드리스 시리즈'

출판 기획자 은현희 주간이 소개하는 구간 한국 문학의 가치

오현성 객원기자 | 입력 : 2024/08/20 [14:28]

# 문화저널21 <출판인노트>는 출판 기획자, 편집자, 마케터 등 현직 출판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무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 한국문학 복간 프로젝트 '엔드리스 시리즈'

 

소설의 첫 문장을 쓰는 것은 마치 광부들이 뚫리지 않는 지하 갱도 앞에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창작의 과정은 그만큼 혹독하고 고독한 싸움이다. 그 단단한 벽을 뚫고 완성된 작품이 무엇보다 소중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첫 문장만큼이나 퇴고의 과정도 치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 러시아 소설가는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는 인간의 심장을 꿰뚫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출간된 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도서출판넥서스가 잊혀 가는 우수한 소설 작품을 독자들에게 다시 선보이는 ‘엔드리스 시리즈’를 출간했다. 이 문학작품의 복간 프로젝트는 1990년 이후 출간된 한국의 현대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바야흐로 1990년대는, 도서 대여점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출판 시장이 변화를 맞게 된 시기다. 이때는 많은 독자가 책을 소유하기보다는 대여하여 읽는 것을 선호했고, 그로 인해 출판계도 밀리언셀러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독서 문화가 대중화되었지만, 동시에 특정 작품이 폭발적으로 팔리는 일도 드물었다. 지금처럼 1인 출판사나 무명작가가 단숨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1995년 3월, 독서계에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사건이 생겼다.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한 젊은 여성작가가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한 것이다. 바로 김미진의 첫 장편소설이자 데뷔작인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이다. 불가사의하게도 단숨에 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작품은, 이전에 한국 문단에서 활동한 적 없는 신예 작가가 쓴 소설이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유롭고 직설적 표현들은 신선한 파격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온갖 잡스러운 미국식 욕설들도 등장한다.

 

 “만약, 누군가 지폐가 가득 찬 돈 가방을 갖고 와서 떠나자고 한다면?” 

 

달러로 가득 찬 돈 가방에 관한 질문이 작품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 한 문장의 물음표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 독자의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감정이입을 하며 읽다 보면 마치 의문부호가 피터팬을 쫓는 후크선장의 갈고리 손처럼 끈질기게 쫓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미상관식 구성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이러한 추리 기법과 열린 결말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한국 문학사의 두 거장인 소설가 박완서와 이청준은 이 작품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이 빼어난 감성으로 쓰인, 예술가적 수작이라고 평했다. 

 

엔드리스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은 2010년 출간된 소설가 한지수 작가의 첫 소설집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이다. 이 소설집은 문단에서 호평받은 작품성이 탁월한 단편소설들이 주로 수록되었다. 일곱 편의 작품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수작들로, 특유의 빛나는 감성과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주변부에 머무르지 않고 먼 나라 낯선 이국의 심층부까지 이르고 있어 서사의 영역이 두루 광범위하다. 이효석 문학상과 이상문학상 등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들과 사회성 있는 민감한 소재와 주제로 주목받았던 의미 있는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필사해도 좋을 만큼 군더더기 없고 세련된 문장이 압권이다. 

 

세 번째 책은 1997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오랫동안 절판되어 희귀도서로 고가에 판매되었던 소설가 겸 번역가 정영문의 『겨우 존재하는 인간』이다. 이 책 역시 김미진의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처럼 작가의 데뷔작이면서 첫 발표작이다. 이 장편소설은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적인 삶의 궤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분노 범죄가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이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예언적 통찰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주영은 이 작품을 통해 보이는, 작가의 언어 조합 능력과 상상력이 매우 탁월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보이지 않는 일상의 탈출 욕구가 한순간에 파괴 충동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독자는 한 인간의 분열적 사고와 기행에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안과 고독, 소외와 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디지털의 발전으로 많은 독자들이 긴 글보다 영상, 소셜 미디어, 유튜브와 같은 대체 매체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다. 그러나 빠르고 감각적인 세계 속에서 아직도 깊이와 신뢰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책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긴 시간과 고뇌를 통해 완성된 양질의 좋은 콘텐츠가 지닌 가치 때문일 것이다. 엔드리스 시리즈는 다가오는 가을에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오현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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