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해리미용실 화명 7호점 / 김요아킴

서대선 | 기사입력 2024/08/12 [09:16]

[이 아침의 시] 해리미용실 화명 7호점 / 김요아킴

서대선 | 입력 : 2024/08/12 [09:16]

해리미용실 화명 7호점

 

해리가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동네에만도 두 곳이 있지만, 단지

훤한 이마에 따뜻한 가위질로

슬쩍 건네는 그 인사말에, 자꾸

까끄리 아재가 거울 속으로 걸어 나온다

 

구식 라디오에서 늘 트로트가 풍겨 나오고

헐벗은 무학소주의 달력이 농염한

단 한 번도 간판이 바뀐 적 없는 우리 뒷집

폭포이발소 주인장

 

널빤지를 의자에 얹고 연한 머리를 맡길 때부터

교복 색과 달리 빡빡 바리깡으로 밀릴 때까지

한 뼘 머리칼을 끝내 지키려 했던 그 시절, 결코

닳지 않을 다이알 비누의 거품이 가시고

신공처럼 수건으로 머릴 털어주던 인간 드라이기

 

그 하얀 가운의 까끄리 아재가

포마드 기름 진한 향기를 날리며

해리와 마주 서 있다

 

이미 아스팔트 밑으로 함께 순장돼 버린

그때 그 기억들, 지금

폭포처럼 사각대는 쇳소리로 환생하고 있다

 

# 동네 이발소는 어디로 갔을까? 시골인 우리 동네만도 네 개나 되는 미용실이 성업 중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자는 이발소, 여자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였으며 서로의 영역이 확고히 갈라져 있었다. 당시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의 두발규정이 남학생은 1cm 이하의 길이를 유지해야 했다. “널빤지를 의자에 얹고 연한 머리를 맡길 때부터/교복 색과 달리 빡빡 바리깡으로 밀릴 때까지/한 뼘 머리칼을 끝내 지키려 했던 그 시절”엔 성인들도 장발이면 거리에서 징계를 당하기도 했으며, 직장인들도 의상과 머리 스타일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1981년 두발 규제 조치가 풀리게 되면서 남성들의 헤어스타일 욕구가 다양해 졌다. 기존 이발소의 트렌디 했던 이 대 팔 가르마, 스포츠형, 포마드 가득 발랐던 올빽 스타일 같은 헤어스타일은 젊은 남성들에겐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진정한 남자는 이발소에서 태어난다’던 영화 속 대사처럼, 과거의 이발소는 남성들의 멋과 우정과 세상 정보를 나누던 일종의 사교 장소였다. 이발사를 뜻하는 단어 ‘Barber’는 라틴어로 수염을 뜻하는 말로, 수염을 깎아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발소는 미용실에서는 받을 수 없는 면도칼 면도를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면도는 단순히 수염만 미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나는 부근부터 시작해서 이마, 콧등, 볼, 귓불 등, 눈썹 빼고 얼굴에 난 솜털은 다 깔끔하게 밀어주고, 콧털과 귀털도 제거해주어 말끔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발과 관련된 유물은 기원전 3500년경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면도날이었다. 고대 그리스도 이발소에서는 손톱과 발톱까지 다듬어 주는 종합미용실의 역할을 하였고, 그리스를 거쳐 고대 로마로 건너갔다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이발이 유행되어 사람들이 모여 머리 깎고, 잡담도 하였으며. 성인식으로 수염 깎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 의식도 이발소에서 했다고 한다. 당시 면도날은 안전상의 문제로 철이 아니라 청동이나 구리제 날을 썼기에 면도는 상당한 고급 기술이 필요해 어지간한 상인보다 돈을 많이 벌 정도로 고급직종이었다고 한다.  

 

서양의 경우, 둥근 막대에 빨간색과 흰색을 칠해서 이발소를 표시하였는데, 18세기 무렵까지 이발소는 이발이나 면도 외에 탈골이나 골절 치료, 혹은 당시 치료법 가운데 하나인 몸에서 나쁜 피 뽑아내기 등의 간단한 의료행위도 행하던 곳이었다. 빨간색과 흰색 조합의 간판이 유럽에서 널리 퍼지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파란색이 추가되면서 오늘날 세계 공통의 이발소 표시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 회전등을 ‘회전간판’ 혹은‘사인볼’이라고 불렀다. 이후 의학이 발달 되면서 더는 이발소에서 의료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으나, 사람들은 머리 깎을 순서를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과 친교를 나누었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으며, 이웃을 만나려 이발소에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안전면도기가 보급되면서 이발소는 면도해주는 일의 의미가 약해졌고, 헤어스타일의 유형이 젊은이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이발소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또한 예쁜 남자 아이돌의 출현으로 남자들이 미장원에 가는 풍조가 늘어나면서 이발소는 노년 고객들이 주로 들렸다. “구식 라디오에서 늘 트로트가 풍겨 나오고/헐벗은 무학소주의 달력이 농염한/단 한 번도 간판이 바뀐 적 없는 우리 뒷집/폭포이발소 주인장”같은 이발사들의 고령화가 겹치게 되면서 점차 이발소는 감소하였고, 새로운 미용기술을 습득한 남성들이 이발소가 아닌 미용실에 취업하게 되면서 이발소는 쇠락하게 되었다.

 

시인이 “이미 아스팔트 밑으로 함께 순장돼 버린” 이발소에 관한 “그때 그 기억들”을 불러내자,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유년 시절 이발소 추억이 “폭포처럼 사각대는 쇳소리로 환생하”였다. 중학교 입학식을 앞둔 며칠 전, 친구 영희 아버지께서 연락을 주셨다. 중학교 입학 축하 단발머리를 꼭 아저씨께서 잘라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희 아버지는 동네 이발사였는데, 어린 시절 자신을 이웃 동네 머슴으로 보내려던 계모에게서 달아나 이발사인 먼 친척 아래서 고생하며 이발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영희 아버지는 이발소 큰 거울 한켠에 딸의 중학교 합격증을 붙여놓고 자랑하셨다. 

 

중학교 입학 축하로 영희와 친구인 나를 예쁜 단발머리로 잘라주고 싶다던 아저씨의 소원으로 난생처음 이발소에 의자에 앉았다. 교칙에 따라 ‘귀밑 일 센티’의 길이로 자르기 위해 등까지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맡겼다. 어머니는 옥양목 흰 손수건을 펼치시곤 싹둑 잘린 갈래 머리카락을 받아 보관하셨다. 중학교 삼학년 무렵, 동네 도로가 확장되면서 영희 아버지네 이발소 근처는 커다란 사거리로 변하여 영희 아버지 이발소 자리는 “아스팔트 밑으로” 사라졌다. 늘 서글서글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영희 아버지 이발소의 기억을 불러낸 시인이 있어 추억으로 가는 시간여행 속에서 유년의 한 시절과 조우(遭遇)할 수 있었다. 좋은 시가 주는 공명현상의 힘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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