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꽃들 앞에서
한여름 낮에 사방에 피어난 꽃들을 가만 바라봤어요 벌개미취도 보라색이고 비비추도 보라색이고 도라지도 보라색이고
이렇게 보라가 흔하다니요 한두 송이만 피어도 좋을 텐데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꽃 이야기나 하려고 합니다 산이 무너지고 터널이 무너지고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라면값 따위가 올라도 죽는 것은 내가 아니므로
보라색 꽃이나 말하려고 합니다 무더기로 피어난 보라색 꽃들 앞에서 미안한 줄도 모르고
# “벌개미취도 보라색이고/비비추도 보라색이고/도라지도 보라색이고”, “한여름 낮에/사방에 피어난 꽃들을 가만 바라”보던 시인은 “보라색 꽃이나 말하려고 합니다”라고 전언한다. “보라색 꽃이나”라는 말 속에는 짐짓 세상 돌아가는 일엔 아주 까막눈이거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거나 아니면 치매에 걸린 노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저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있는 “보라색 꽃이나” 말하겠다고 한다.
빨강과 파랑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색이 “보라색”이다. 보라는 순우리말이지만 그 어원은 몽골어 ‘boro/poro’에서 유래했다. 만약 빨강도 파랑도 서로 자기 색깔만 고집하며 섞이려 하지 않았다면, 보라색은 태어날 수 없었던 색이다. 빨강과 파랑은 서로의 속성은 달라도 같은 목표달성 지점을 가지고 있다. 빨강색은 정열적이면서 진취적이고 공격적이며 목적을 위해 돌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에 비해 파랑색은 폭력 없는 저항, 인내, 긴 호흡을 통해 목표달성에 이르는 색이라고 한다. 목표에 이르는 길은 각자 다르지만, 두 색은 궁극적으로 같은 결과를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는 이것을 ‘모순의 조화’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두 색이 혼합된 “보라색”은 초월성 또는 두 개의 힘의 관통, 병합, 모순의 제거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산이 무너지고/터널이 무너지고/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으로/라면값 따위가 올라도/죽는 것은 내가 아니므로”라고 전언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이기적으로 들리지만, 우리 일상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나의 죽음과 무관할 때, 그 모든 사건은 그저 TV 화면 속 사건 사고일 뿐인 것이다. 그 사건 사고 속에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공감(Empathy)하기는커녕, 자신의 생 앞에 치열한 꽃그늘 아래서 가쉽(gossip) 거리나 뒤적이고, 재미 삼아 악플이나 달고, 게임이나 쇼핑 중독에 빠져 있다면, 그들은 “미안해할 줄 모르는” 인간이며, “보라색”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미안(未安)함은 ‘감정의 평형수(平衡水)’라고 한다. 미안한 감정은 두 가지 주요한 심리적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안함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실수나 혹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한 후회나 자책감이다. 두 번째는 상대에 대한 순수한 미안함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는 미안함이란 그리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실수에도 미안해할 줄 알아야 큰 실수도 미안해할 수 있다. 미안함에 대한 자각증상이 없어진다면, 파충류와 무엇이 다르랴. 물론 미안한 일들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 있다. 어쩌다 실수로 미안해야 할 일이 생겼다면 절실하게 미안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진심으로 사죄할 때, 일반적으로 용서해주는 것은 인간관계의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므로 마치 약점이라도 잡은 듯 꼬투리 잡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행동이다. 미안함을 표현하게 되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두 가지 목적을 달성시켜준다. 첫째는 미안함을 표현 함으로써 손해에 대한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미안한 행동으로 낮아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평판, 즉 사람들의 평가점수를 유지 시켜줄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미안함은 겉으로 보기엔 상대를 위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자신이 당할 불행을 최소화하려는 목적도 내재 되어 있다.
“산이 무너지고/터널이 무너지고/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등은 내가 저지른 실수는 아니다. 그래도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지구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산이 무너지고/터널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 나도 포함될 수 있다.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뉴스난을 가득 채운 사건 사고들이 비록 내가 저지른 실수가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시인은 전언하는 것이다. 시인은 “보라색 꽃”들을 이야기함으로써, 빨강과 파랑이 서로 섞이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순의 조화’와 ‘병합’ 등을 의미하는 보라색의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운다. 치유의 색이기도 한 “보라색”은 몸과 마음의 조화를 원할 때 끌리게 되는 색이다. ‘보라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향해 나가는 척할 뿐이다. 사실은 전진하는 게 아니고 오직 휴식을 취할 기회만 찾는다’고 전언했던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말을 음미해 본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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