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의 안보이야기] 인천대첩으로 명명하자

김종철 | 기사입력 2023/09/26 [14:18]

[김종철의 안보이야기] 인천대첩으로 명명하자

김종철 | 입력 : 2023/09/26 [14:18]

지난 8일부터 18일까지 인천 월미공원, 크루즈 부두, 내항 등에서 해군 첩보부대 전사자 추모식, 맥아더 장군 동상 헌화, 기념식을 비롯해 상륙작전 재연, 함정 공개 행사, 세미나 등이 열렸다.

 

이번 행사는 약 10여년 만에 이루어지는 대규모 행사로 지난해 실시한 행사에서 인천시가 밝힌 것과 같이 인천 상륙작전 행사를 국제 행사로 발전시키기 위한 예행연습이다. 기념식에 최고 국군 통수권자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참가해 적·아를 명확히하고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정부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했다.

 

인천 상륙작전은 5단계로 이루어진 작전이다. 1단계는 해상 통제권 장악 단계이다. 1950년 6월 25일 04:00경 38도선에서 북괴의 불법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최대의 위기에 있었지만 해상에서는 대한해협 해전을 비롯한 옥계 전투, 대통령 이송 작전 등 수많은 해전으로 해상 통제권은 동·서·남해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즉 6.25 전쟁 발발부터 힌반도 주변 해역에서 해상 통제는 대한민국 해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2단계는 결정단계다.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맥아더 장군과 지휘부는 인천을 포함한 군산, 주문진 등을 상륙 지역으로 검토했으나 최종적으로 인천으로 결정됐다.

 

군산은 북괴군의 보급로 차단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점이 문제고, 주문진은 태백산맥의 고봉으로 인해 신속한 작전이 불가해 마지막 단계에서 인천이 결정된 것이다. 물론 인천도 조수 간만의 차이로 인해 어려운 점이 있었으나 단숨에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수도 서울을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탄환 하는데 유리했다. 

 

물론 이것은 인천 상륙 작전을 실시하기 약 3개월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에서 만난 소년병의 말에 감명을 받아 인천 상륙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해방 후 미군이 인천을 통해 남한에 상륙했기 때문에 인천항 수로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단계는 정·첩보 수집 단계다. 3단계는 인천 상륙작전의 핵심 단계로 정 · 첩보 수집 단계가 없었다면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8월 16일 해본 지시에 의거 702함을 지휘함으로 하여 총 8척의 함정 승조원으로 육전대를 구성해 도서 탄환 작전을 수행했다. 인천항 수로 입구에 있는 문갑도부터 탄환하기 시작하여 덕적도, 이작도 군도, 영흥도 등을 순차적으로 탄환했다.

 

도서 탄환 작전과 병행하여 8월 18일 부산을 출발한 함명수 소령(제 7대 해군 참모총장 역임)의 X-ray팀은 8월 24일 영흥도에 상륙하여 인천항을 비롯한 수로와 시설물에 등에 대한 정 ·첩를 수집하여 지휘부에 보고하고 9월 14일 퇴출했다.

 

또한 9월 11일 인천 북서방 해역에서 상륙작전 직전 있어든 이성호 중령(제 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지휘하든 PC-703함이 기뢰 수송 선박을 발견하여 통신 및 기류, 발광 신호에도 불구하고 무응답으로 인천항으로 항해하는 괴선박을 격파사격으로 침몰 시켰다. 기뢰 적재 선박을 발견하지 못 했다면 인천 상륙작전은 미루어 졌거나 아니면 취소되었을 것이다.

 

4단계는 결정적 작전 단계이다. 함포 지원과 상륙군의 인천 월미도 상륙 단계이다.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해 미 제 10군단을 창설하여 한국 해병대 제 1연대는 미 1해병사단, 육군 제 17연대는 미 제 7사단에 배속 시켰다. 그리고 한국 함정 PC-4척, JMS 7척 등이 공격 부대로 참가하는 등 함정 총 261척이 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돌격 해안은 녹색해안, 적색해안, 청색해안, 황색해한 등으로 나누어 상륙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각 부대별 임무도 활당됐다.

   

5단계는 안정화 단계 및 진격단계이다. 상륙작전 후 인천 시내에 있는 적 잔당을 소탕하는 단계로 적은 최후의 발악을 하였으나 곧 진압되고 인천항이 군수물자 지원 등을 통해 서울 수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인천 상륙작전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이다. 6.25 전쟁 당시 북괴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 시 결정적 작전으로 적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기습을 통해 위대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인천 상륙작전은 약 14만여 명의 아군 및 유엔군과 20여 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의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동안 밀리는 전선을 역전시키는 효과와 통일을 눈앞에 두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정도면 인천 상륙작전이 아니라 인천 대첩으로 명명해야 한다.

 

인천 상륙작전에 있어서 대한민국이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은 많이 있겠지만 맥아더 장군과 손원일 제독이다

 

맥아더 장군은 2차 세계대전 중 50여 회 이상 태평양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한 경험하고 있으며 성공에 대한 확신하고 인천 상륙작전을 불가라는 미국 정부와 부하들을 설득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또한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은 사지로 떠나는 부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전 시에는 솔선수범하여 부하들과 함께 행동하고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함양 시켰다.

 

이 분들만 잊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함명수 소령님의 X-ray팀, 영흥도 주민 그리고 Lee 작전 함정 장병, 이성호 중령이 지휘한 PC-703힘 장병 그리고 결정적 작전에서 전사한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분들을 위한 추모비와 추모관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월미도에 각각 마련해야 한다.

 

오늘도 인천항 수로에서 본 수많은 도서와 월미도는 빛나고 아름답다.

 

김종철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 연구위원

 

※외부 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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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수병 2023/10/06 [18:16] 수정 | 삭제
  • 그런데 해병독립단 오야붕 정 도 영 홍보 金 현 진 全 도 봉 도라이 는 해군이 한게없다고 떠들고 다니는데 분명히 이렇게 역사와 기록들 문서가 나와잇는데 행사 주최를 해군이 반환하라고 떠들고 다니고 잇습니다 귀신잡는 해병大,,,, 해군 우 리 는 하 나 다 ~~~ 故,,,, 손 제독 은 대 한 민 國 해 병 大 를 창설한분이시기기도 합니다 , 해병大 어 버 이 십 니 다 본人 창설 한 부대인데 얼마나 애착이 가겟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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