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5천만원에 갇힌 뱅크런' 닫힌 문 열릴까

이환희 기자 | 기사입력 2023/03/16 [11:32]

[초점] '5천만원에 갇힌 뱅크런' 닫힌 문 열릴까

이환희 기자 | 입력 : 2023/03/16 [11:32]

#외환위기는 혹독했고 믿을 언덕은 은행의 저금뿐이었다. 엄마는 은행들이 망한다는 얘기들을 듣고 돌아왔다. 실제로 큰 은행들이 하나, 둘 문을 닫거나 은행끼리 합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불안했다. 엄마는 시중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바라고 2금융권 은행에 돈을 맡겼다. 옆집부터 은행이 문을 닫으면 예금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사실이 됐고 한동안 엄마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다음날 은행 앞에 달려가니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예금 전액을 보장해준다는 금융당국의 발표가 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진을 풀었다. 우리는 은행에서 나눠준 순서표대로 기다린 뒤 예금을 찾았다. 하룻사이에 하늘과 땅이 붙었다 떨어졌다. 그날 뉴스를 보니 예금 완전 보장이 “금융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직 어렸던 그해 '도덕적 해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듣기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해 여름 저축은행들은 고금리를 보장했다. 시중은행보다 1~2%가 높았다. 아버지는 우리나라 제2의 도시를 상호로 넣은 저축은행에 예금을 맡겼다. 그때 그를 누가 말렸어야 했다. 얼마 뒤 뉴스에서 해당 은행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근거가 막연한 특수목적법인을 세우고, 해외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웠으며 유력 정치인들에게 금품을 건넸다는 소리였다. 오너의 고등학교 동문들이 각종 자리를 차지하고 친인척들에게 담보, 보증인도 없이 천문학적인 돈을 대출해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버지는 퇴근을 하면 멍하니 뉴스만 바라보았다. 나도 막연히, 우리집 이야기인가 그의 곁에서 지루한 뉴스를 응시했다. 

 

이튿날부터 은행 앞은 장사진을 이뤘다. 아버지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은행 한 구석에 주저앉았다. 석간신문에 저축은행은 제1금융권이 아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예금 보장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였다. ATM기에 여러번, 통장과 카드를 번갈아 넣었지만 우리집 돈은 인출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인출을 시도했고 성공했던 누군가는 손에 돈을 쥐었지만 얼마되지 않았다. 결국 은행은 파산했고 우리가 저금한 돈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날부터였나. 아버지의 입에서 술내음이 가시는 날은 없었다. 

 

▲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예금보호 95년 예금보험공사 창립과 시작 

현행 예보 5천만 원 한도 내에서 보장 

 

예금자보호의 역사는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이 마련된 후 예금보험공사가 설립됐고 이후 2천만 원부터 시작해 2001년 5천만 원에 이르기까지 시행령에 따라 은행 고객들의 예금이 보호됐다.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특별히 전액이 보호됐는데, 우체국을 포함한 1금융권 시중 은행들이 대상이었다. 2000년대 초반 저축은행들이 부실, 부정 경영으로 파산하자 많은 예금자들이 예금 보호를 받지 못한 이유다. 2011년 2차 저축은행 사태가 벌어졌어도 예금자보호 금액은 인상되지 않았다. 

 

현행 예금보험공사는 5천만 원의 예금을 보호해준다. 은행이 파산할 경우 얼마의 금액을 입금했어도 5천만 원 이하는 보장해준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금액이 요즘의 예금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금자 한도 보호는 법이 아닌 시행령인 셈이라 한도를 높이는 것도 국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가 바꿀 수는 있다.  

 

SVB파산 후 미 정부 예금 전액 보호 선언

SVB사태 다른 은행 번지는 것 막으려 

모바일뱅킹 시대 뱅크런 눈 깜짝할 새

 

SVB(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되자 미국 정부는 예금 전액을 보호해준다는 발표를 했다. 13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 발표에 힘을 더했다. SVB 뱅크런은 손쓸 새도 없이 벌어졌다. 여느 뱅크런처럼 불안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었는데 적어도 은행 지점이나 ATM기 앞에라도 가야 시작됐던 뱅크런에 비해 모바일뱅킹의 확산으로 스마트폰 조작 몇 번에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돈이 빠져나갔다. 불과 44시간이 걸렸다고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제2의 SVB 사태를 차단하려는 일환으로 예금 전액 보호를 결정했는데, SVB로 인한 불안심리가 다른 은행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두고 우리 정부에서도 예금자 보호 금액을 인상하거나 전액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와 주목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 예금보호 금액 상향 검토 지시

국민세금으로 금융사 지원한다는 비판, 

금융사 한 두곳 붕괴 시 국민경제 미치는 영향 더 크다는 반박

 

15일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최근 내부 회의에서 국내 금융사에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예금 전액을 보호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가능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금융당국의 수장 가운데 하나인 금융위원장의 언급이었고, 이는 구체적인 방향 검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앞서 외환위기 당시에 예금자들의 예금을 전액 보호했던 전례가 있었지만 이는 특수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 김주현 금융위원장(가운데)(사진=금융위원회 제공)

 

SVB사태 이후 은행의 이상 조짐을 느낌과 동시에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 뱅크런이란 특수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미 정부는 실리콘밸리은행(SVB)에 이어 시그니처은행이 파산하자 뱅크 런이 다른 은행들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12일 “예금자 보호 한도를 넘더라도 예금 전액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미국의 조치에 비춰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조치를 두고 국민 세금으로 금융사를 일으켜 세워준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금융사로 이전되는 돈이 국민 세금은 아니다. 예금보험공사의 재원은 금융권들의 갹출(예금 잔액의 0.08~0.4%)로 마련되기 때문. 그 돈도 고객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금액이겠지만, 금융권 한 두 곳에 이어 연쇄 도산하면 해당 사태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큰 비용을 불러온다는 데에 예금보험공사의 존재 근거와 역할이 놓여있다. 

 

비단 SVB사태의 교훈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와 증가한 국민 자산을 염두에 둘 때 예금보호 규모를 높이자는 이야기는 전부터 나왔다. 2001년 5천만 원으로 상향된 지 22년이 지난 셈이다. 

 

예금 규모 증가, 예보 금액 시대 뒤떨어진단 평가

예보 인상 고객 부담 커져, 고액 자산가만 혜택 비판도

예보공사 TF꾸려 예보 금액 적정선 논의 중

 

예금자 보호 한도가 장기간 동결되면서 한도를 초과한 예금의 규모도 늘어나고 있다. 2017년 말에는 5000만원을 초과하는 예금이 724조3000억원으로 전체 예금의 61.8%였지만, 작년 6월에는 1152조7000억원(65.7%)까지 불어났다

 

선진국들의 경우 우리보다 더 많은 금액을 보장해준다. 미국은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 영국은 8만5000파운드(약 1억3000만원), 일본은 1000만엔(약 9700만원)까지 예금자 보호가 이뤄진다. 

 

다만 예금자보호 금액이 오르면 그 부담은 금융 고객들로 전가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우선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려면 금융회사들이 내는 보험료를 높여야 하는데, 늘어난 보험료가 결국 금융 소비자 부담으로 이어진다. 또 은행에 5000만원 이하 예금을 보유한 고객 비율이 98.1%인 상황에서 한도를 높이면 소수의 고액 자산가만 혜택을 본다는 의견도 있다. 

 

 

 

예금보험공사는 지난해 3월부터 태스크포스를 꾸려 적정한 예금보호 금액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은 오는 8월 나올 예정이다. 어느 선까지 보호금액이 되든, 전액이 되든 예금보호 금액이 조정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화저널21 이환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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