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 칼럼] 살아있는 예술인의 모임을 기대하며.....

강인 | 기사입력 2022/11/14 [09:42]

[강인 칼럼] 살아있는 예술인의 모임을 기대하며.....

강인 | 입력 : 2022/11/14 [09:42]

지난 1990년에 개봉되었던 미국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가 생각난다.

 

1950년대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톰 슐만(Tom Schulman)'의 시나리오로 제작하여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은 작품이다.

1959년 당시, 미국 버몬트주의 귀족 학교인 ‘윌튼 아카데미’는 아이비리그(Ivy League) 합격자 순위에서 늘 최상위권을 기록하는 미국 최고의 고등학교이다. 이 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 졸업 후에는 의사, 변호사, 교수, 정치가 등 미국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온갖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부모들은 앞다투어 자식들을 윌튼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려 하고, 이러한 부모들의 욕구를 알고 있는 자녀들은 모두가 이에 순종한다.

어느 날 이 학교에 '존 키팅' 이라는 새 교사가 부임해 온다. 그 역시도 윌튼 아카데미 출신으로 이번에 모교에 와서 후배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는 첫 시간부터 파격적인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점차 그를 따르게 된 학생들은 공부보다 중요한 인생의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영화의 명대사로 꼽히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은 존 키팅의 교육관을 한마디로 압축해 주는 키워드(Key Word)라고 볼 수 있다. 아이비리그에 학생을 보내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던 보수적인 윌튼 아카데미에서 존 키팅의 교육관은 재미있고 신선하지만 동시에 학부모나 학교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과 시련을 겪게 된다.

존 키팅은 서서히 학생들의 ‘캡틴(Captain)’이 되어간다. 그전까지 학생들은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다. 그런데 존 키팅을 만난 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도서실에서 존 키팅의 졸업 앨범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Dead poets society(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이름의 뜻을 물으니 존 키팅은 자신이 학창시절에 만들었던 비밀 동아리의 이름이라고 말해준다.

 

이 ‘Dead poets society’는 존 키팅이 당시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약간 떨어진 산속에 있는 인디언의 동굴에서 소로우(Thoreau)나 휘트먼(Whitman), 셸리(Shelley) 등의 시를 읽거나, 자작 시를 읊으면서 낭만을 즐겼던 비밀 모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용기있는 학생들은 그날 밤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동굴에 모여 과거 존 키팅의 낭만주의 비밀 모임을 재결성, 옛 시인들의 시를 돌아가며 낭송하기도 하고, 자기가 지은 시를 발표하기도 하며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용기있는 학생들이 동굴에 모여 과거 존 키딩의 낭만주의 비밀 모임을 재결성한다.

 

오늘 필자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문득 지난날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생각난 것은 그 영화의 제목이 지금 '죽어가는 우리 예술인의 사회'와 흡사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행복은 성공이고, 성공은 곧 돈이라는 방정식에 맞춰 살아가는 자들에게 있어서 의학과 법률, 경제, 기술과 같은 것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육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출세하고 부를 누리다 보니, 대부분 윤리와 도덕은 팽개친 채 얼음장처럼 차가운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육체적인, 외형적인 요건만 풍족하게 갖추어진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다. 진정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그에 걸맞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풍요로움은 ‘낭만’에서 비롯되고 낭만의 모체는 문화예술이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인간이 추구하는 순수 낭만보다는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고정된 욕심의 틀, 즉 재력이나 권력, 명예를 위한 틀에 얽매인 채 아귀다툼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이 낭만의 수원지인 문화예술은 소외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언론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예술계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비평의 지면이 사라지므로 예술평론가는 존재 의미를 상실했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형의 보존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전통예술은 '현대적 재해석에 의한 새로운 가치의 창조'라는 이해할 수 없는 명분을 통해 악기, 리듬, 창법 등의 마구잡이 변형으로 인한 '퓨전(Fusion)'화로 한국 국적을 잃어버렸다.

문화예술계가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낭만이 사라지고 문화예술이 도외시된 세상이 바로 '죽어가는 사회'가 아닐까 싶다.

필자가 이 글의 제목을 ’시인...‘ 대신 ’예술인...‘으로 바꾼 것은 큰 의미에서 시는 예술의 한 장르이고 또한 이 글이 예술계에 메시지로 작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더욱이 14세기 무렵 ’죽은 서유럽 사회‘의 재건을 위해 일어난 ’르네상스(Renaissance,문예부흥)‘는 원래 ’재생‘ 즉 ’죽게되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라는 뜻의 단어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유산을 재생시켜야 한다는 데서 시작된 ‘문화혁신운동’인데, 오늘날 죽어가는 사회의 재생을 위해 의식있는 예술인들의 노력에 의한 한국적 르네상스의 부활을 희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있는 예술인의 모임을 기대하며...‘라는 제목을 붙여보았다. 

 

이렇듯 문화예술계가 죽어가는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본다면, 첫째는 ’정부의 역할‘이고, 둘째는 ’예술인의 자세‘이다.

정부의 역할

 

“새로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에서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실려 있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 나오는 명언으로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문화강국론’으로 불린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문화예술 창달이 나라를 살릴 것"이라고 갈파했듯이 문화예술은 정치, 외교,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 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은 국가를 부강케 한다.

예컨대 일본이 오늘날 세계 최 강대국이 된 이유 중 두 가지를 꼽는다면 하나는 구미(歐美)인에 대한 사창산업이요, 또 하나는 문화예술 때문이다.

전후 일본 여인들은 앞을 다투어 가며 서양 남성들을 선호했고 서양 남성들은 이러한 여인들을 마치 윤락녀 대하듯 유린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윤락 행위가 일본의 경제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사창산업과 예술이 만나 탄생된 유명한 작품이 바로 푸치니(Giacomo Puccini)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이다.

 

▲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포스터

 

일본은 이 오페라의 주인공인 15세의 ‘초초(나비의 일본음역)’와 같은 ‘게이샤’를 비롯한 여성들의 윤락 행위가 경제적 성장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부끄러운 역사가 담겨있는 오페라를 근세 일본의 대표적 음악문화인 양 세계에 공개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는 이미 19세기 중반 이후 20세기 초에 걸쳐 미술을 통해 문화예술이 국력 신장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디 일본이 예술적으로 탁월한 국가는 아니다. 다만 ‘자포니즘(Japonisme)’에 의해 일찍이 유럽인들에게 예술 강국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뿐이다. 

‘자포니즘’이란 당시 서양 미술 전반에 나타난 일본적인 취향 및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로서 1872년 프랑스의 미술비평가인 ‘필립 뷔르티(Philippe Burty)’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실제로 예술적 수준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비교도 되지 않는 이웃나라 일본은 세계인들에게 우수한 국가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일본의 정원이나 전통의상 등은 이미 금세기 초 유럽 각국의 화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폴 고갱' 이나 '반 고흐'같은 저명한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반영하기도 했다. 특히 ‘끌로드 모네’는 작품 소재로 일본의 전통의상이나 일본풍의 기물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자신의 집 벽을 일본 판화로 장식하였으며, 만년에는 파리 교외에 일본풍의 정원을 만들어 수련(睡蓮)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또한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는 '자포나르(Japonnard)'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일본 미술에 심취하였다. 덕분에 일본은 일찌기 세계 주요 선진 강국들에게 일본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231.6x142.3Cm, 1875~1876,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아내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작품으로 당시 '자포니즘'에 심취한 '모네'의 일본 미술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최근 “21세기 비틀즈”, “걸어다니는 대기업”,이라는 별명으로 “21세기 세계적인 팝 아이콘”이라 일컬음을 받는 한국의 ‘방탄소년단(BTS)’은 대중음악을 통한 국위선양의 차원을 넘어, 경제적으로도 2019년 10월, 46억5,000만 달러(약 5조 5,283억 원)의 국내총생산(GDP)을 창출했는가 하면 “BTS는 앞으로 10년간 한국경제에 37조원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추정된다”고 미국 CNBC가 보도하였다. 

 

이는 앞서 언급한바,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은 국가를 부강케 한다”라고 한 백범 김구 선생의 ‘문화강국론’을 증명한 한 실례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지난 정권, 오랜기간 대통령 곁에서 국가의 문화예술 정책을 보좌해온 ‘문화수석비서관실’이 폐지되었고 이어서 현 정권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문화예술 분야 전문가의 조언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반증으로 공직자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마치 계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과거, 유럽에 알려진 일본의 ‘자포니즘’은 '운수'였지만, 오늘날 세계 대중음악의 탑스타로 인정받는 ‘방탄소년단’은 '실력'이다. 또한 문화예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속 빈 강정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억지스러움의 발로였지만, 대한민국의 정책은 금옥같은 예술자원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문화예술의 발전은 국민의 행복과 직결된다. 따라서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문화예술계가 아직도 관 주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 하의 우리나라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관치행정은 후진국의 전형으로, 그 특징은 말만 무성할 뿐 실행이 없다. 이는 행정관료들의 전문성 결여와 이에 따른 복지부동이 그 원인이다. 한 마디로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뭘 알아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나라 예술정책은 극히 소수의 관료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자들의 수준이 이 정도이고 보면 문화예술정책의 활성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술인의 자세

과거 제3공화국 시절에 세워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천명한 '문예중흥'의 실행 현장이었다. 그 현장에는 당시 예술문화계의 신망있는 민간 지도자들이 포진하여 진두지휘했다.

 

당시 음악계 거목이었던 지휘자 '임원식'을 위시해서, 미당(未堂) 서정주와 함께 ‘조선 청년문학가협회’를 이끌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을 지낸 문학평론가 '곽종원'과, 한국 연극계의 정신적 지주인 연극평론가 '여석기' 같은 문화예술계의 거두들이 일찍이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설립위원으로 기틀을 잡았으며 이어 '송지영', '정한모' 등 문화예술계 맹주들이 원장으로서 대통령의 큰 뜻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예술인(단체)들에게 지원금이나 나누어주는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이는 문화예술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도 없거니와, 설사 대통령의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 분야의 지도자가 없어 문화예술의 최고이념인 홍익인간을 펼칠 수 조차 없는 불행한 시대이다.

 

예술​가들은, 정부가 문화예술을 도외시함으로 국가 문화예술 발전을 저하시킬 중대한 요인이 될 수 있는, 대통령실 직제상 ‘문화수석비서관실’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분노는커녕 비굴하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정부에 개인적으로 안테나를 깊게 드리우고 정치적 선심성 지원금을 받기 위해 예술가의 자존심마저 팽개친 채 혼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순수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기보다는​ 이타적이다. 순수란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아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술가는 정부의 불의한 정책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불의에 분노할 줄 모르는 이기적 예술인, 순수하지 못한 순수예술인들이 순수예술계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한 ‘죽은 예술인의 사회’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근배 시인은 ’잔‘이라는 자신의 시를 통해 답답한 시절을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무엇하러 금세기에 태어나서 빈 잔만 들고 있는가?

노래를 잃은 시대의 노래를 위하여 모여서 서성대는가?.....”

 

순수 낭만과 노래를 잃어버린 시대에 빈 잔만 들고 서성대는 ’죽은 예술인의 사회‘를 일컫는 구절이다.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을 정부에만 맡길 수 없다. 이제 살아있는 예술인들이 침묵을 깨고 모여 분노해야 할 때다. 이것이 예술인과 국민과 나라의 살길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새벽이 오기 직전에 가장 깊다고 했다. 문화예술은 이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우리의 조국을 희망의 새벽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불의에 분노할 수 있는 ’살아있는 예술인의 모임‘을 기대한다.

 

강인

문화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외부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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