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2000년대 한국시가 거둔 기념비적 성과 ‘이건청 시전집’

최재원 기자 | 기사입력 2022/09/05 [10:58]

[대담] 2000년대 한국시가 거둔 기념비적 성과 ‘이건청 시전집’

최재원 기자 | 입력 : 2022/09/05 [10:58]

# 오랜 생명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원텍스트 자료집

 

1967년 시단에 등단한 이후 55년, 치열한 시정신으로 한국시의 정도를 걸어온 시인 이건청. 그의 평생이 담긴 ‘이건청 시전집’의 시편들은 2000년대 한국시가 거둔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된다. 유명무명의 시집들이 쏟아져 나오는 한국시의 풍토에서 1,5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출간된 ‘이건청 시전집’은 시는 무엇이며 시인은 어떤 소명을 향해 정진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명징한 답변이다. ‘이건청 시전집’의 저자 이건청 선생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이건청 시전집 (1530 페이지. 국학자료원)

 

최재원 기자. 축하합니다. 우선, 시 전집을 낸 소감을 들려주시지요.

 

이건청 시인. ‘시전집’은 한 시인이 추구해온 시적 정진의 기록을 한 자리에 모아둔 책이란 점에서 중요성을 지닙니다. 한 시인이 시의 정수를 모은 서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이 한 생애를 살고 이승을 떠난 후에도 죽은 시인을 증언해주는 것도 ‘시 전집’입니다. 올해로 만 80세가 되었습니다. 시를 만나기 위해 하얗게 새운 밤들과 뜻깊은 이미지들을 만나기 위해 헤매다닌 낯선 길들이 떠오릅니다. 이제 살아야 할 날이 차츰 짧아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노년기에 펴내는 ‘이건청 시전집’ 앞에서 심호흡을 하는 셈입니다.

 

시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오신 삶의 지표가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면구스럽습니다만 나는 시를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그 시의 자리에 닿기 위해 허위허위 노력해온 셈입니다. 만 40년 동안 나는 교직에서 강의를 해왔습니다. 중고등학교 교사 10년, 대학교수 30년, 호구지책 때문에 많은 시간을 교단활동에 할애해야 했지만, 시 쓰는 일에 가장 많은 노고를 바쳐온 셈입니다. 

 

시인들이 시 이외의 명예를 탐하는 일도 있었지만 나는 시 말고 다른 명예를 쫓으며 시인의 위의를 던져버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했습니다. 시가 아닌 다른 명예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1969년, 내가 시인의 길에 나서게 되었을 때, 스승 박목월 선생께서 내게 주신 경구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자네가 이제 시인의 길에 나서지만, 언제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이쯤 하면 되었지, 싶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자네가 시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할 것이다.“

 

 

▲ 이건청 시집 (월간문학사. 1970. 4.25)의 출판기념회(호수그릴. 1970.5)에서 박목월 선생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박목월 선생 슬하에서 10여 년 시 공부를 하셨다고요?

박목월 선생을 스승으로 시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내가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 때입니다. 학교에서 문예 작품 발표회를 하게 되었고 박목월 선생과 조지훈 선생 두 분을 초청 연사로 모시게 되었어요. 두 분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뵙고 초청 수락을 받아오는 것이 내 역할이었습니다.

 

내가 박목월 선생 댁을 찾아 나선 것은 1959년 9월 20일 경이었어요. 전화가 귀한 때였고, 편지 연락은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어서 직접 선생 댁을 찾아 나섰던 것이지요. 선생 댁이 원효로 전차 종점 부근이라는 말만 믿고 무조건 원효로행 전차를 탔고 원효로 4가 전차 종점에 내렸었지요. 원효로 4가 종점. 부근 복덕방을 찾아가 ‘박목월 선생댁’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놀랍게도 복덕방 영감께서 선생댁을 친절하게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9월 20일 밤 8시경, 달이 휘영청 밝았었지요. 신창동 비탈길 적산가옥, 거기서 선생을 뵐 수 있었습니다. 헤아려 보니 그때 선생 연세 44세. 지금 같으면 이제 시단 중진급에나 속하셨을 연세에, 또 40세에 겨우 접어들었을 지훈 선생도 한국 시의 원로 자리에 우뚝 정좌하고 계셨었지요. 그날 밤 까까머리 고등학생 이건청과 목월 선생의 어설픈 만남이 내 생의 명운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그때는 몰랐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그때 양정고등학교 제1회 문예 작품 낭독회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문학소년 이건청은 박목월 선생의 평생 제자가 되었고, 10여 년 선생의 시작 지도를 받아 시인의 반열에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선생 작고 후 한양대 시학 교수의 자리에 설 수 있게도 되었답니다. 

 

최근 간행된 ‘이건청 시전집’의 서문을 보니 이번 시전집에 1959년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1959년이면 선생님 연세 17세, 고등학교 학생 때였겠는데요. 그 첫 작품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꽃마을은 풍년이다// 

저마다 하늘을 겹하여/ 시간 속 아늑히 볕이 드는데//

산정으로/ 꽃이란 꽃들은 모여 온다// 

모여와/ 열매줍던 메아리 밑으로 스며/ 저마다의 기치를 올린다//

빛살로는 지금쯤 어디서/ 목소릴 키우고 있을 것이데//

올해도 하늘을 넓히며/ 지잉지잉 경사를 알리는 것이다//

‘봉선화’ 전문

 

열일곱 살 소년이 쓴 작품으로 비약이 심하고, 전체적인 구조력도 좀 더 짜임새를 갖추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연이나 설명은 극도로 배제하고 있음이 보이는군요. 첫 시집 ‘이건청 시집’(1970. 4. 25.)을 낼 때, 그때까지의 습작품 중에서 ‘봉선화’ 한 편을 내 첫 시집에 수록했습니다. 내 문학소년 시절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서요. 내가 이 시를 썼을 무렵이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던 그 무렵이었습니다.

 

# 엄격했던 스승 박목월 선생 슬하에서 10년 시 공부

 

박목월 선생 슬하에서 시 공부를 하셨다니 선생님의 총애를 받은 셈이네요?

 

1959년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고, 나는 시적 영감을 찾아 미몽 속에서 헤매는 소년이 되어버렸습니다. 꿈속에서도 시를 쓰곤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선생께서 강의를 열고 계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한양대학교는 공과대학으로 시작한 대학이어서 문학 전통이란 것은 거의 전혀 없는 곳이었습니다. 거기 박목월 선생이 강의를 열고 계셨습니다. 

 

1960년대의 거의 전 시기를 박목월 선생을 찾아다니며 시 공부를 했지요. 피아노나 바이올린, 미술 공부는 엄청난 레슨비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한국 제일의 스승 박목월 시인께 개인 독대로 시 공부를 했지만, 레슨비라는 것 몰랐었습니다. (웃음) 그 대신 선생께서는 제게 매우 엄격한 기준을 두고 있었지요. 제 개인에게는 엄격한 스승이었던 셈입니다. 나는 스승님의 기대에 닿아가기 위해 엄청난 노고를 감내해야 했었습니다. 1970년 4월에 나의 첫 시집인 ‘이건청 시집’을 간행하게 되었는데 이 시집의 서문을 선생께서 쓰시면서 이때의 형편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李君의 作品을 보아온 지가 十年이 넘었다. 그동안 李君의 끈기있는 노력과 精進은 그가 얼마나 誠實한 文學徒임을 충분히 證明해 주는 것이다. 그는 成熟을 기다리는 한 알의 열매처럼 내일에 대한 확고한 信念과 기대를 가지고, 十年을 如一하게 自己의 세계를 深化 ․ 洗鍊 ․ 硏磨해 온 것이다. // 진작부터 나는 李君의 참신한 詩風과 그의 타고난 남다른 詩才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보다 알찬 成熟을 기다려, 세상에 그를 疏槪하는 자랑스러운 時期를 고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成熟에의 길고 긴 忍耐와 自己完成에의 어수선한 課程을 거쳐, 이제 그의 광우리에는 잘 익은 과일로 그득하게 채우게 된 것이다…”

 

 

▲ 이건청 시인이 (사)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역임하던 2011년 당시 본지와 인터뷰하던 모습.   ©문화저널21 DB

 

# 시는 표현을 위한 방법적 의장意匠을 발견하는 일 

 

선생님께서는 엄정한 시 정신을 지키면서 시의 길을 걸어오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시 정신은 무엇인가요?

 

시 정신이란 것은 시인에게 시를 쓸 수 있게 하는 방법과 힘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올바른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라면 자신의 시를 온전한 자기 것이 되게 하는 엄정한 정신적 토양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동안 내가 써온 시들을 모두 모아 ‘이건청 시전집’을 간행해내고 나서 나는 시의 위의(威儀)를 지키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온 시인이었구나 생각하곤 합니다. 내가 아는 시단의 어느 시인은 “내 시는 일상의 기록”이라고 하고 또 어떤 시인은 “시는 말놀이”라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만 시는 훨씬 고양된 언어 양식이고, 긴장된 함축과 폭발력을 지닌 언술 양식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이번에 시 전집에 수록된 800여 편의 시들을 찬찬히 읽으며 ‘방법적 의장(意匠)’을 획득하기 위해 무궁무진 애를 써왔다고 하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이 생각이나 느낌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찾아 제시해 보이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참 고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는 ‘의장’을 찾아 제시할 때 시가 되는 것이지요.

 

이제 시인으로 살아온 나의 소산을 모아 펴내는 ‘이건청 시전집’의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시 이외의 다른 가치를 더 높여 추구하지 않으려 했으며, 시를 가지고 세상 풍진 속으로 가서 시가 아닌 다른 가치를 탐하지 않았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인이 시를 써서 여기저기 발표하고 나면, 시인이 쓰고 발표한 시편들을 수습하고 맥락을 세우고 의미를 밝혀 記述해주는 분들이 있다. 한국시 연구에 신명을 다하고 계신 시 연구 학자들이 있겠지요. 이번 ‘이건청 시전집’을 깊게 연구한 학자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시 연구 학자들의 눈에 띄어 "발견"되는 시편들이 일차적으로 '문학사적 생명'을 부여받을 가능성이 싹트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이건청의 시를 깊게 분석하고, 그 의미를 지속해서 고찰해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습니다. 송기한(대전대 교수), 곽명숙(아주대 교수) 교수 같은 분들인데요. 이분들은 오랫동안 이건청의 시를 분석, 정리해오고 있답니다. 내가 아는 한 이분들이 가장 예리하고 깊이 있는 분석으로 시와 시인을 연구하는 한국의 대표적 학자들에 속해있습니다.

 

송기한 교수와 곽명숙 교수가 이번 ‘이건청 시전집’에 수록된 12권 개인 창작 시편들의 의미와 문학사적 맥락을 분석한 글들을 집필해주었습니다. 원고지 200매쯤 식의 방대한 저술이었다. "이건 청의 전기 시 분석"을 송기한 교수가, "이건청의 후기 시 분석"을 곽명숙 교수가 맡아주었지요. 이분들의 글은 이번에 간행된 ‘이건청 시전집’에 수록되었습니다. 

 

시인이 시 전집을 내면서 유념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시 전집’을 간행하기 위해서는 60여 년에 이르는 시인의 총체적 자료와 업적을 모두여야 하는 커다란 노고가 필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당한 비용을 들여 방대한 자료집을 세상에 남깁니다.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시 전집’을 펴내는 이유는 시 전집이 한 시인의 시적 업적을 집대성하는 일이면서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시인 연구의 텍스트로 남아 한국 시문학사를 위한 연구 자료집이 되기 때문입니다.

 

 

▲ 이건청 시인의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

2021년에 간행된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는 선생님 시의 결정판이라는 평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라캔스를 찾아서’는 우주천문학 ․ 고생물고고학 ․ 선사지질학 등 연구 축적 속에서 생명의 기표를 찾아다니며 직면하게 된 새로운 세계를 담아낸 시집입니다. 하늘에는 사람의 인지능력으로는 측정 불가의 역동적 우주가 실재實在하고 있으며, 지구 표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38억 년 이후 퇴적암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생명 기표들인 화석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3억 6천만 년에서 6천 5백만 년 전, 퇴적암에서 발견되던 화석 물고기 실라캔스가 몇억 년의 시간을 물속에 살았으면서도 물속 환경을 따라가 진화되지 않은 육지 척추동물의 몸으로 어부의 그물에 잡혀 올라왔습니다. 지구가 겪은 융기, 충돌, 분화를 포함한 모든 변화양상과 내용은 켜켜이 쌓여 시기별 지질시대地質時代의 암반층으로 굳어 있지요. 이 우주 천문의 세계와 선사지질의 시대가 지닌 무량수無量壽의 과거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지요. 

 

지구의 표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38억 년 이후의 지구의 변모의 모습은 바위 속 화석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시인이 화석자료들을 불러내 시로 소통하는 영원과의 대화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이승을 떠나더라도 이 과거의 시간과 반갑게 만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육신 나이 80에 접어들며 내 궁극의 귀향처를 발견하게 된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

 

앞으로 나는 육신의 쇠락도 견디며 시에 몰입해야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한 형형한 눈으로 사물과 현실을 투시하도록 노력해야 하리리는 점을 자각하곤 합니다.

 

오랫동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늘 건강하셔서 좋은 작품 많이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문화저널21 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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