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괜히 서점에 가고 싶어진다.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던 사람들도 책을 찾게 되고 종이책을 한 장씩 넘기며 읽는 아날로그 감성에 취하곤 한다. 독서의 계절 가을에 함께 감상하기 좋은 우리나라 책 그림을 소개한다.
‘책거리’는 볼거리, 구경거리, 먹거리라는 말처럼 책과 관련된 다양한 기물을 그린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책장 안에 책을 가득 그린 ‘책가도’와 구분하기도 하는데, 모두 책거리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책가도는 책과 학문에 대한 애정이 물씬 풍기는 그림이다.
조선 후기 정조는 선대 왕들이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어좌 뒤에 펼쳤던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 병풍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문치주의를 선언한 정조는 평소에도 독서를 좋아한 왕으로 왕실그림을 그리는 화원을 뽑는 시험에 ‘책가(冊架)’, ‘책거리(冊巨里)’란 주제를 만들었다. 미인도로 유명한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은 이 시험에서 책가도 주제로 그리지 않아 유배를 갔다는 안타까운 일화를 전한다.
화원들은 왕의 지시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그림에 자신의 낙관을 찍을 수 없었다. 책가도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화원 이형록은 책가도 안에 도장을 자신의 인장으로 그려 넣어 비밀스럽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진귀한 예술작품 수집, 전시, 과시했던 공간인 이탈리아의 ‘스투디올로(Studiolo)’, 경이의 방란 뜻인 독일의 ‘분더카머(Wunderkammer)’, 프랑스에서는 호기심의 서재라 일컫는 카비네 드 큐리오지테(Cabinet de Curiosité)가 있었다.
이는 후대에 뮤지엄의 전신이 된다. 17세기 중국 청나라는 비싸고 진귀한 물건들을 주로 가득 채운 ‘다보격(多寶格)’이 전해지며 그림으로도 그려진다. 조선 책가도 병풍은 격자형 장식장의 모습은 다보격과 비슷하지만 책을 중요하게 여기며 책과 문방사우를 중심으로 화면을 채운 모습이다.
양반들은 책거리 병풍에 당시 중국과 서양에서 들어온 신식 외래물품과 귀한 물품들인 안경, 자명종, 부채, 도자기, 청동기, 바둑판, 거문고 등을 등장시켜 자신의 부와 명성을 뽐내기도 하였다. 호피장막도는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장막으로 휘장 한 그림인데 살짝 장막을 들어올려 일부만 볼 수 있게 했다. 장막을 걷었을 때 더 많은 진귀한 물품들이 가득할 것이라는 신비로우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재미있는 그림이다. 그림의 주인의 권력과 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 예로 석류와 수박은 씨가 많아 다산을 상징하고, 영지버섯은 장수를, 잉어는 출세를 상징한다. 용, 학, 토끼, 해태 등 동물들도 등장하여 길상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담긴 그림이다. 민화 책거리는 원근법을 무시한 파격적 그림이다.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크게 그리고 아닌 것은 작게 그리는 등 표현주의적이며 입체적이다. 금방이라도 책과 기물들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조선 시대 책거리 그림은 지금 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며 패턴화되어 보이는 무늬는 디자인적이고 추상적이다. 다채로운 미감이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 책거리는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미술관 등 해외의 박물관, 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으며 미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등에서 기획전시가 개최됐다.
책거리가 해외에서 유독 한국의 책거리가 인기를 끄는 것은 앞서 언급한 특징들과 당시 동시대 동서양 미술을 살펴보았을 때, 책을 주제로 한 그림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고 지금까지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예부터 지금까지 우리 곁에서 지식을 주고, 취미가 되어주고, 삶의 희망을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특히 요즘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래 지속되는 시기에 책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이번 가을에는 책거리를 감상하며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이겨내길 기원하고 우리 일상에 행복이 스며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송지수 ((사)한국민화협회 간사, 미술사 석사과정)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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