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차 한 잔 / 길상호

서대선 | 기사입력 2020/10/26 [09:19]

[이 아침의 시] 차 한 잔 / 길상호

서대선 | 입력 : 2020/10/26 [09:19]

차 한 잔

 

묵언黙言의 방

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 찻잎 덜어낼 때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 소리도

다관茶罐 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헹구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 번 먼 강을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이 말을 들으면 귀가 밝아진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 자체가 된 이 한마디는 2400년 전 클레온(Cleon)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던진 말이었다. 이 말은 1900년이 지난 후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의 번역 성경 서문을 거치고, 그 후 500년이 더 지나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의 연설에서 인용되었으며, 1863년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으로 인용되었다. 클레온의 말 한마디가 24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남아 지구촌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말이 주는 힘과 품격을 느끼게 한다.      

 

인생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나 최악의 순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보다는 ‘그 순간을 누구와 함께 했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그 순간 특정한 사람과 교감하면서 느낀 ‘감정’이 오래 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저버리곤 하는데, 그 이유란 것이 고작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자신의 체면 때문에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는데, 소중한 사람이 느낄 실망과 상처에 비하면 그것을 통해 얻는 자기 위안은 너무도 초라하고 허망할 뿐이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어도 편안할 것이니라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중국사에서 가장 극심한 분열과 혼란의 시기였던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까지 무려 다섯 왕조 열 한명의 황제를 섬긴 ‘설시’의 말이다. 재앙은 많은 말이 아니라 ‘한 마디 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나라 때 사마천의 외손인 양운(楊惲)은 ‘앙천부부(仰天附缶): 하늘을 바라보고 질 장군을 두드린다’ 라는 시 한편 때문에 허리가 잘리는 죽임을 당했다. 또한 한나라 때 서순은 상관인 장창에게 ‘오일경조(五日京兆): 닷새 동안 밖에 벼슬자리에 있지 못할 것’ 이라고 했던 말 때문에 저잣거리에 시신이 내걸렸다.

 

유튜브에선 검증되지 않은 말 폭탄이 난무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떼로 몰려가 악의적이고 야비하고 공격적인 말들로 댓글을 달고, 아님 말고 식의 거짓말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내뱉는 세상 도처에 지뢰 같은 말들이 뇌관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 세상은 시끄러워도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었고, 붉은 단풍은 푸른 가을 하늘과 대비되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가을이다. 수 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품격 있는 말들이 그리운 이 가을, 맑고 향기로운 “차 한 잔” 앞에서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보고,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마음도 식혀볼 일이다. “마음의 먼지”도 깨끗하게 씻기도록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며,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면서 “침묵”을 배워보면 어떨까.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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