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엄마와 곤란 / 박후기

서대선 | 기사입력 2020/10/19 [10:02]

[이 아침의 시] 엄마와 곤란 / 박후기

서대선 | 입력 : 2020/10/19 [10:02]

엄마와 곤란

 

엄마가 나를 낳을 때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나를 낳은 후의 기쁨도

나는 모른다

 

아픈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내가 퇴원해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울다가 웃던 엄마의 기쁨을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고통이거나 기쁨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나는 그것을

아주 곤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 무심했던 걸까, 게을렀던 걸까.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의사는 엄마의 의식이 돌아오게 된다면, 엄마에게 ‘희망 재구성’ 시간을 만들어 드리란다. ‘희망 재구성’ 이란 얼마 남지 않은 이승의 시간을 여한 없이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저 중환자실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고, 가족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 머물러 계실 수도 있으리라. 초조함과 절박함에 입술이 마른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엄마가 의식이 돌아와 가족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해 진다면, 의사의 말대로 엄마의 ‘희망 재구성’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 시인이 몰랐던 엄마의 시간들을 찾아가 엄마를 이해해드리고 싶다. 엄마가 시인을 임신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입덧은 하지 않았을까. 어떤 임산부들은 아기를 출산하는 날까지 입덧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던데... 어떤 음식이 유독 먹고 싶었을까. 뱃속에서 태아인 자신이 첫 발길질로 힘차게 존재를 알렸을 때, 엄마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아버지는 기뻐하셨을까. 아니면 엄마 혼자 배를 끌어안고 눈물지었을까. 시인이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려고 준비하던 진통의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순산했을까. 엄마의 생명을 위협하던 난산이었을까. 엄마 배 위에 안겨주던 새 생명 앞에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식인 “나는 모른다”.

 

“아픈 나를 바라보던/엄마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맞다. 자식들은 모른다. 여자가 엄마가 되면 자식 앞에 달려드는 위험한 물체를 향해 온 몸을 던져 막을 수 있는 정신과 용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식이 아프면 엄마는 자신이 대신 아프지 못해 가슴이 쓰리고, 자식이 온전한 몸으로 다시 일어서도록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조상님, 아니 지상의 모든 신성한 것들에 머리를 조아려 부탁하고 빌어보는 마음이 엄마의 마음인 것을 자식은 “모른다”. 

 

엄마에게 묻고 싶다. 엄마가 진정으로 살고 싶었던 삶은 어떤 것이었느냐고. 가족들만을 위하느라고 묻어버린 자신의 꿈은 어떤 것이었는지, 귀 기울여 들어드리고 싶다.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알고 싶다.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에 쫓긴다며 더욱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엄마는 늘 뒷전이었어도 묵묵히 견디시던 엄마. 자식들은 수시로 친구도 만나고 집으로 함께 와선 며칠을 딩굴며 먹고 놀았어도, 엄마도 친구 만나고 맛난 것 드시라고 권해 본적도 없었다니. 외로웠던 시간들, 슬프고, 화나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꾹꾹 눌러 감추느라 생긴 우울증과 화병을 모른 척 했던 건 아닐까. 엄마 자신만의 시간, 엄마 자신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깨어나야 할 이유가 이리 차고도 넘치는 데, “중환자실”에 누워 아득한 저승과 이승의 경계인 ‘그레이 존(gray zone)' 에서 어리둥절하고 계시다니... 엄마, ‘사랑 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중환자실 문 밖에서 시인은 입술을 깨문다. 깨어나세요, 엄마. 이대로는 정말 “곤란”해요.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