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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역사_봉수대 이야기①] 근대이전의 통신역사 - 봉수제도

4차 산업혁명 기술로 만나는 옛 봉수대 이야기 ①

이세훈 | 기사입력 2018/09/05 [09:32]

[통신역사_봉수대 이야기①] 근대이전의 통신역사 - 봉수제도

4차 산업혁명 기술로 만나는 옛 봉수대 이야기 ①

이세훈 | 입력 : 2018/09/05 [09:32]

▲ 이세훈 소장 

[편집자 주] 본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근대 이전 통신의 원천인 옛 봉수대 이야기를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6개의 섹션으로 구성해 본 칼럼을 기획해 연재한다. 필자는 1979년부터 현재까지 KT에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 KT 마이크로웨이브통신중계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인간은 예로부터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통신수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기호나 표현 언어를 사용하였다. 인간의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언어만으로는 통신수단의 한계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바위나 벽 등에 기호를 새겨 기록하거나 북·나발·깃발 등의 신호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이후 문자의 발명은 통신수단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문자는 특히 기록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문자 전달에 많은 이동시간과 거리의 제한 등 제약요소가 따랐다. 이를 극복하고자 신호전달 체계를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예가 불을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시각신호체계의 하나인 봉수제도이다. 

 

봉수, 최초의 통신수단

봉수제도는 다른 나라의 침략이나 위협으로부터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데 적의 침략을 막거나 미리 알리는데 통신망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봉수제도는 옛 통신수단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중계방식으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연기나 불을 이용하여 원거리까지 빠르게 전달할 수 있도록 했던 통신망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중요한 군사통신 목적으로 널리 이용하였다.

 

봉수를 전달하는 봉수대는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약 643개 달한다고 증보문헌비고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8도 328개의 고을 수록에는 빠짐없이 봉수대가 등장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각종 읍지에도 봉수대의 위치정보가 고을마다 수록되어 있다. 

 

전달방법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晝烟夜火) 그 갯수를 정해 변방의 정세를 중앙에 전달했다. 이 방법은 사람이 눈으로 직접 관측할 수 있어야하며, 멀리 바라보기 좋은 시야 장애가 없는 높은 산정상에 위치해야 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여서 해안에 접근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시설 축조와 동시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해안방어를 했다. 육지에는 산성과 봉수대를 축조하여 영토를 보전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맡았다.

 

이와 같은 봉수제도는 국가차원의 기간통신의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만약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연기와 횃불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봉수는 인편이나 역마를 이용하는 것보다 그만큼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시간상 효율적이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북소리·호각소리와 같은 청각매체 전달방식과 깃발·연을 이용하는 시각매체 전달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비둘기나 매와 같은 조류를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봉수는 우역과 더불어 근대 전기통신이 사용되기 이전에 가장 보편적인 통신방법 이었다. 

 

▲ (시계방향으로) 솟대, 용고,봉수,파발,우역,신호연 ▲솟대(立木):솟대는 새를 상징하는 조각목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 놓아,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솟대를 통하여 하늘에 전하고 그 뜻을 받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솟대는 인간과 하늘과의 통신을 위한 안테나였다. ▲용고(龍鼓):북은 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악기는 물론이고, 통신의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전쟁중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진군시에는 북을 치고, 후퇴시에는 징을 울린다고 알려지고 있다. ▲봉수(烽燧):고대 통신방식중 가장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봉수제도이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에 정보의 내용을 원거리까지 전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전국을 연결하는 봉화통신망이 존재하였다.▲파발(擺撥):파발제도는 긴급한 군사정보와 공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봉수보다 전달속도가 느리지만 문서로 전달되어 보안유지가 되기 때문에 군사정보, 행정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우역(郵驛):인편을 이용한 통신수단으로 직접 걸어서 전하는 것과 말을 타고 전하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 하달하고 지방에서 중앙으로의 보고사항을 전달하는 통신수단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호연(信號煙):신호연은 전투신호를 위한 암호전달에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직접 고안해 낸 것이라 하여 일명 충무연 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수는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통신수단중 가장 빠른 통신수단 

봉수대의 가장 큰 기능은 불과 연기를 올려서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백성과 임금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봉수는 크게 5가지 방법으로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4개, 적과 싸우고 있다면 5개의 봉수를 올렸다.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중앙에 알려주는 기능 외에도 평상시 1개의 봉수가 피어오르는 봉수신호는 아무일도 없다는 의미였으며, 백성들은 봉수신호가 오른 것을 매일매일 관찰하며 안심하고 생업에 임하였으므로 생업안정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자연조건 때문에 비가 와서 불이나 연기를 피울수 없거나 바람이 불어 연기나 불이 잘 보이지 않을때에는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로 빨리 달려가 그 소식을 직접 전달하였다. 옛날에 소식을 전하던 방법에는 편지를 쓰거나, 사람이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는 방법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소식이 전달되거나 또는 소식의 전달속도가 매우 늦었다. 

 

봉수는 옛 통신수단 중에서 가장 빨리 모든 사람들에게 어디서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하여 똑같은 소식을 전할수 있는 방법이었다. 봉수대에서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불이나 연기를 피워서 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소리나 글로 소식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이나 연기를 피우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디서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국민들은 적의 침략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어서 나라를 위기에서 지켜낼 수 있었다.

 

봉수는 인편과 말을 이용한 파발제에 비교하면 적의 병력수, 이동상황, 아군의 피해상황등을 자세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단점은 있었지만, 역으로 파발통신원의 생포로 인한 정보누출의 위험이 적었으며 정보의 전달속도라는 측면에서는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에 널리 애용된 통신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전기통신의 도입,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봉수대

1885년 유선·무선을 매체로 이용하여 전기적 방법으로 문자·음성·영상 등의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방식인 전기통신(Telecommunication)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인천-한성-의주간(서로전신선) 전신선 개통이 되는 시기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다. 이후 1888년에는 한성-부산간(남로전신선), 1891년 한성-원산간(북로전신선)이 각각 가설되는 등 기간 전신선과 각 지선이 속속 가설되어 전국적인 전신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1898년에는 왕궁에 자석식 전화를 설치했는데 전화로 명령을 하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질적인 전화사업이 시작된 것은 1902년 3월로 한성-인천간 정부 주도로 통신원 경영의 사업용 전화가 개통되면서 부터이다. 전신시설이 속속 가설되고 전화사업이 점차 활발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 농공상부 통신국을 폐지하고 통신원으로 독립 시켰다. 전보,전화가 개통되면서 고려시대부터 사용하던 봉수, 파발제도가 구한말 사라지고 근대적 통신의 시발점이 되었다.

 

▲ 전기통신 역사와 봉수제도의 폐지 △1885년 9월 28일: 경인전신선 준공개통(한성-인천 재물포) 1885년 10월 13일: 경의전신선 준공개통(한성-의주) 1888년 5월 27일: 남로전신선 준공개통(한성-부산) 1891년 6월 22일: 북로전신선 준공개통(한성-원산) 1895년 5월 9일: 봉수제도 폐지 1897년 10월 23일: 전라전신선 준공개통(한성-목포) 

 

광화문 세종로,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의 역사적 의미

우리나라 전기통신사업을 처음 시작한 장소는 한성전보총국 옛터인 서울 종로구 세종로 80-1 번지이다. 현재 광화문 광장 세종로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이 위치한 광화문 세종로공원은 고종때 한성전보총국, 통신원 등의 통신기관이 있었던 터이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발원지인 이곳을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게 알리기 위하여 1992년 한국통신(현재kt)은 당시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전문가의 검증을 받아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이 있는 장소 근처는 농상공부 통신국, 한성전보사, 한성전화소, 한성우체사, 통신원의 자리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광화문전화국 등 전기통신 건물들이 있던 곳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통신인들의 아련한 추억과 긍지를 갖고 있는 의미 깊은 기념탑이다.

 

▲ 광화문 세종로공원(옛 광화문전화국)에 있는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 상징

세종로 공원에 높이 9m, 폭 13m의 화강암과 오석(烏石)으로 된 탑을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으로 명명하여 1992년 9월 26일 제막하였다. 전기통신 발상지 기념탑은 상징성, 조형성, 예술성, 주변환경과 조화를 고려하여 조형된 작품으로 밝고 친근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전기통신 발상지를 상징하는 터의 개념으로 하단부를 대지형태로 조형하고 상단부는 통신역사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봉수와 안테나 형태로 표현하여 역사로부터 새로운 시대로 계승되는 정신적 심벌로 표현하고 있다. 

 

2차 산업혁명으로 봉수제도는 전기통신시대로 변화 

4차 산업혁명(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은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이루어낸 혁명시대를 말한다. 현대사회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우리의 생활 역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편리해졌다. 4차 산업혁명은 18세기 초기 산업혁명 이후 네 번째 중요한 산업시대이다.

 

최초의 1차 산업혁명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주로 농경사회에서 농촌사회로의 전환이 산업과 도시로 바뀌는 시기였다. 봉수제도는 1차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차 산업혁명은 1870년대에서 1914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 기간에 우리나라는 정국이 혼란하던 구한말에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전선을 가설하면서 근대적 통신시설을 도입했다. 그리고 1885년 대한민국 최초의 전화국인 한성전보총국을 설립하여 전기통신이 도입되면서 불과 연기를 이용했던 봉수제도는 역사속으로 그 발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계속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ㅇ 한국의 봉수(눈빛출판사,조병로,김주홍글)

ㅇ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전기통신(2007년)

ㅇ 한국학중안연구원 자료실(aks.sc.kr)

 

이세훈  KT 마이크로웨이브중계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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