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밭머리에 서서 / 박용래

서대선 | 기사입력 2017/09/25 [08:15]

[이 아침의 시] 밭머리에 서서 / 박용래

서대선 | 입력 : 2017/09/25 [08:15]

밭머리에 서서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 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배추꼬리도 맛이 있었나니

눈 덮인 움 속에서 찾아냈었나니

 

하얗게 밑둥 드러내는 무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무꼬리 발에 채였었나니

아작아작 먹었었나니

 

달삭한 맛

 

산모롱을 굽이도는 기적 소리에 떠나간 사람 얼굴도

스쳐가나니 설핏 비껴가나니 풀무 불빛에 싸여 달덩이처럼

 

오늘은 

이마 조아리며 빌고 싶은 고향

 

# 김장김치가 반양식이던 시절이 있었다. 늦가을 마당 한 쪽 풍로 위 커다란 솥에선 얼큰한 찌개가 끓고, 마루 위에선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 대여섯 분이 붉어진 손으로 절인 배추에 소를 바르셨다. 노란 배추 고갱이를 한 잎 뜯어내어 무생채에 젓갈과 고춧가루와 마늘과 생강이 버무려진 배추 소를 돌돌 말아 한 입 넣어주시던 어머니.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 머리에 서서/생각하노니”, “산모롱을 굽이도는 기적 소리에 떠나간 사람”들도 낯선 타향에서 김치도 담구고 국도 끓여 먹으며 고향의 배추밭과 무밭을 생각 했으리라. 김장 담구고 남은 배추와 무는 움막 속에 저장 해 두었었는데, 한 겨울밤 이른 저녁을 먹고 뱃속이 헛헛할 때, 움막에서 꺼내 깎아 먹던 배추꼬랑지와 무의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새끼줄로 엮은 무청 시래기를 레이스처럼 걸쳤던 초가집 진흙 벽들은 사라졌다. 입 안이 붉게 물들었던 붕어과자를 팔던 점방 자리엔 편의점이 들어섰고, 내닫던 둑방길 위로 도로가 생겼다. 목화밭도, 배추밭도, 무밭이 있었던 곳도 개발이 되었지만 유년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고향엔 여전히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 위로 된장 잠자리 날고 있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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