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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기획] 역사 속의 태극기…생사고락 함께해왔다
최초의 태극기는 누가 만들었나…만세운동에서 광복까지의 모습
'대한독립만세' 선조들의 혼 서린 태극기…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나
 
박영주 기자 기사입력 :  2017/03/0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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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개최된 제97주년 3·1절 기념행사 현장에서 본행사 이후 거리행진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최초의 태극기는 누가 만들었나…만세운동에서 광복까지의 모습

'대한독립만세' 선조들의 혼 서린 태극기…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나 

 

3·1절이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선조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흔들었던 태극기에는 민족혼과 함께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일제의 총칼에도 지식인과 종교인들, 유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된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태극기를 소지하기만 해도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시절, 유관순 열사는 17살의 나이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짖었다. 

 

역사를 바꾼 것은 ‘민초’로 불리는 일반 서민들이었다. 시작은 지식인들이 중심이었을지라도 점차 농민에게로, 아녀자에게로,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번져가며 독립운동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지도자의 무능 혹은 부재 상황에서 언제나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어온 이들은 민초였다. 태극기에는 ‘백의민족’으로 불렸던 선조들의 얼이 담겨 있다. 

 

그러한 태극기가 최근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휘둘리며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지자체 등의 행사에서는 태극기를 휘두르는 것을 자제하는 모양새다. 다른 한편에서는 태극기를 되찾아오겠다며 태극기에 노란리본을 달고 있다. 

 

이에 광복회에서는 3·1절을 앞두고 “태극기에는 선열들의 나라사랑과 숭고한 희생정신이 담겨있다”며 “태극기가 특정이익을 실현하려는 시위도구로 사용된다면 태극기를 소중히 여기셨던 선열들에 대한 예의도, 도리도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양측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현재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태극기. 그 시작은 어떠했고 어떤 역사를 거쳐 왔는지, 태극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되짚어보고 3·1절을 맞아 진정한 태극기의 가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최초의 태극기는 누가 만들었나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 내지 않겠다”

고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태극기…피의 역사와 함께했다

 

‘최초의 태극기’가 만들어진 배경은 1876년(고종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제로 조선의 항구를 개방하도록 하는 내용의 한·일 양국간 강화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일본의 주장은 ‘일본 국기가 게양된 운요호를 왜 조선 수군이 포격했느냐’였다. 당시 조선에는 국기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국기에 대한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후 고종은 김홍집에게 국기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김홍집의 지시를 받은 이응준은 태극문양 주변에 8괘가 그려진 ‘8괘 태극기’를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또다른 설도 있다. 1882년 8월경 수신사로 일본에 가던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이 배 위에서 즉석해서 태극기를 만들고 이후 고종에게 보고해 지금의 태극기가 정착됐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이를 놓고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김홍집이냐, 이응준이냐, 박영효냐를 놓고 공방이 거세게 일었다. 지금의 4괘 태극기에 가장 유사한 것은 박영효의 태극기라는 설과, 최초의 태극기로 불릴만한 것을 만든 쪽은 김홍집, 이응준이라는 설이 충돌했다.

 

그러나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사용된 태극기 도안이 발견되면서 박영효가 태극기를 그리기 전 이미 태극기가 제작돼 있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 데니 태극기로 불리는 태극기. 구한말에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인 데니(O. 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다.  (사진=문화재청)

 

일각에서는 8괘 태극기를 놓고 중국의 지시로 만들어졌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일본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1882년 10월2일자 시사신보에 게재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중국의 지시에 응하는 고종의 태도다. 자료에는 “이에 국왕(고종)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 내지 않겠다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태극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국의 압력이 있었으나, 고종 황제는 중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태극기는 지금과 유사한 모습으로 1883년 3월 왕명으로 국기를 제정해 공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극기는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장례식에서도 등장했다.

 

고종황제의 죽음은 ‘조선독립’의 목소리에 불을 붙였다. 만세운동이 전국8도를 넘어 해외로까지 번지면서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이 과정에서 태극기의 모양은 차차 정착됐다. 

 

 1919년 3월1일 오후2시 서울 종로구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3창을 불렀다. 모인 군중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며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 같은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벌이며 태극기를 소지한 이들을 막무가내로 고문하고 가두는 등의 행태를 자행했지만, 만세운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구속되는 피의 역사에 태극기가 함께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의 태극기. 임시정부의 태극기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사진=문화재청)

 

1919년 4월13일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임시정부 수립이후 선조들은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편, 각종 외교활동을 벌였다. 일본의 탄압에도 독립운동을 벌였던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안창호 선생, 유관순 열사 등은 언제나 태극기와 함께했다.

 

그 전까지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였던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극기를 활용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정착하게 됐다.  

 

일제에 굴하지 않는 민족혼이 서려있는 태극기는 ‘광복’의 기쁨에도 함께했다. 1945년 8월15일 정오에 일본쇼와 천왕은 방송을 통해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했다.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1929년의 만세가 슬픔과 한이 서린 만세였다면, 1945년의 만세는 기쁨과 환희의 만세였다. 이후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을 때도 태극기는 함께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2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북측은 1950년 6월25일 대대적 남침을 강행, 한반도는 반으로 쪼개졌다. 

 

광복과 독립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태극기는 또다시 남북분단에서 흘리는 피로 적셔져야 했다. 지금도 6·25 전쟁 전사자들의 유해가 발굴되면 태극기는 이들의 주검이 담긴 관을 감싸준다. 

 

48년 동계올림픽…최초로 휘날린 태극기

가슴에 일장기를 달아야 했던 손기정 선수의 설움 

2002년 월드컵 ‘뜨거운 함성’을 기억하십니까

 

스포츠의 현장엔 언제나 태극기가 함께해왔다. 대한민국이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처음으로 출전한 세계대회는 48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개막한 동계올림픽이었다. 

 

메달의 유무보다는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KOREA’라는 이름으로 출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는 올림픽이었다. 

 

그전에 있었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박혀있던 국기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였다. 

 

월계수 묘목으로 국기를 가린 손기정 선수의 푹 숙인 얼굴은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라 하지 못했던,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지 못했던 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스포츠에서 태극기의 위상이 최고에 달했던 것은 단연 2002년 월드컵 때가 아닐까. 축구가 강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4강까지 올라가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손에 든 채 응원전을 펼쳤다.

 

당시 ‘붉은 악마’라고 불렸던 이들은 서울시청 앞은 물론 전국 각지를 붉게 매웠고 대형태극기 응원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고도 시민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민국”을 연호했다.

 

이후 태극기는 스포츠 경기 때마다 대한민국 대표 선수들,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해왔다. 김연아 선수가 한국인 최초로 피겨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해 태극기를 두르고 빙판 위를 달렸을 때, 많은 국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2006년 WBC에서 한국 야구팀이 우승을 하고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을 때도, 작년 리우 올림픽에서 박상영 선수가 우승 후 태극기를 들고 환호했을 때도, 태극기는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켜주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문화저널21 박영주 기자 pyj@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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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명삼 17/03/01 [22:01]
요즘 태극기가 칠푸이 맹신하는거뜰 때문에 고문당하고 있다카든데 그거뜰 말카 국기모독죄로 감옥에 집어 쳐 여야 되는거 아이가? 기왕이믄 서대문형무소 고문방을 부활시키가 거따가 집여쳐 여믄 대낄인데~ 수정 삭제
lovecorean 17/12/04 [16:37]
미국외교고문인 데니에게 하사한 고종의 태극기는 혼이 뜯겼다. 짝퉁이다.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든 태극기는 혼이 뜯겼다가 돌려놨네? 뜯기는 것을 보니 짝퉁이다. 짝퉁이란, 왕의 비준이 없는 국기이다. 국기라고 할 수 없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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