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기단과 계단 및 주춧돌 쌓기

강봉환 | 기사입력 2008/01/03 [10:16]

한옥의 기단과 계단 및 주춧돌 쌓기

강봉환 | 입력 : 2008/01/03 [10:16]
이번장은 지난장에 이어 한옥의 시공과정중 기단과 계단 및 주춧돌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4, 기단과 계단 


* 처마 밑을 따라 흙·잔디·돌·벽돌·기와 그리고 강회 섞은 삼화토를 써서 마당보다 높직하게 쌓는 것을 죽담·댓돌 또는 기단이라고 한다. 죽담은 작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돌 죽담과, 진흙으로 굴림백토를 만들어 토담집에 구조한 흙 죽담, 쓰고 남은 기와를 흙에 박아 만든 디 새죽담, 말뚝을 받아 무너지지 않도록 쌓은 것들이 있다. 

 
* 죽담을 구성하는 데는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낮은 죽담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 물이 집 쪽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막고, 지표면보다 한 단 높게 함으로써 마당에 고인 물이 집안으로 스며들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죽담을 지표로부터 높직하게 쌓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땅의 습기와 곤충을 피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높직한 자리에 주인이 거처함으로써 하인 등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면서 지시할 수 있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기단이나 죽담이 높은 경우에는 마당에서 기단을 올라가기 위한 발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돌을 포개어 놓거나 나무토막을 놓아 딛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섬돌 또는 돌층계라 하는데, 옛적에는 '버덩'이라 불렀다. 버덩이 고급스럽게 구성되어 있으면 이를 '다리(橋)'라 불렀다. 불국사의 청운교(橋)나 칠보교 등이 바로 그런 명칭이다. 

 
섬돌, 계단은 장대석을 보석(步石)삼아 그것만 쌓아 올려 층계를 구성한 것과 그 좌우에 소 맷돌을 놓아 장식한 것 등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일반 백성들의 집에는 소 맷돌을 장치한 돌계단은 설치할 수 없다고 『삼국사기』는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조까지 지켜져 내려온 사항이었다.
 



▲ 기단     ©강봉환
기단 표면에 섬돌, 버덩을 설치하지 않고, 죽담이나 댓돌에 골을 파 그 안에 층계를 설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화계(花階) 등에서 찾아보기 쉬운데, 이것 역시 고급스러운 방식이다. 

 

그 외에도 계(階), 단(壇), 월대(月臺), 축대 등의 구조물들이 존재한다. 
 
▲   축대  © 강봉환
 

 

 
 
 
 
 
 
 
 
 
 
 
5, 주춧돌
 
▲ 그렝이질을 제대로한 주춧돌  ©강봉환

기둥을 따로 세우는 집에서는 터를 고르고 지경 다지고 방아찧어 단단히 견축(堅築)한 자리나 입사로 기초한 자리에 주초(柱礎)를 놓는다. 

주초를 놓기 시작하였을 때, 처음에는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만영(李萬榮)선생은 『재물보(才物譜)』에서 나무 주추에 관해 그 발음은  '지(支)'와 같이 한다고 하며. 옛날엔 나무로 주추 삼았던 것을 지금은 돌로 쓴다."고 하였다. 

돌을 주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어느 때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분분한데, 『삼국사기』의 고주몽과 관련된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유리왕조(琉璃王條)에 보이는 기록을 초기단계의 내용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다. 유리왕조의 관련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禮)씨에게 장가들어 아기를 배었는데, 마침 주몽은 부여왕족들의 시기를 받아 압록강 쪽으로 탈출해야 했다. 그가 떠날 때 부인에게 "일곱모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유물이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찾아 가지고 나를 찾아오면 아들로 믿겠다."는 말을 남겼다. 장성한 아들 유리가 일곱모난 주추위에 소나무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밑에서 도막칼 하나를 찾아낸다. 이것이 신표(信標)가 되어 부왕(父王)을 만나고, 유리는 고구려 제 2대의 임금이 된다. 

삼국사기』연표에 따르면, 고주몽이 살던 집은 b. c 37년 이전에 지어진 집이다. 주몽이 b. c 37년에 고구려를 개국하였으므로 부여에 살던 집이 윗대 어른이 지은 집이라면 적어도 b. c 60년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하게된다. 이미 그 시기에 일곱 모난 주초를 다듬을 수 있는 기법이 발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에겐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현대인들 중에 서구식 기하학에 정통한 분은 7각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로 생각한다. 360도의 원에서 7각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론이다. 그런데도 동양에서는 7각을 자유롭게형성하였고, 인도에서는 7각의 동전을 지금 사용하고 있다. 그런 7각이 고구려에서는 b. c 1세기에 응용되었고 고주몽의 집에서는 주초석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돌 다듬는 기법은 상당한 발전을 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집안 태왕릉의 석재 중에 돌을 둥글게 떠낸 쐐기의 흔적을 남긴 것이 있다. 이런 기법은 지금도 매우 어렵다고 고개를 설레는 정도이다. 그런 것을 5세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 조선조 중기에 간행된 『산림경제』에는 돌을 써서 주춧돌 놓는 기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훈련된 목수 없이 집을 지을 때 참고 하도록 하였다. 


초(礎)를 축기(築基, 기초)위에 놓을 때는 반드시 첩토온안(帖土穩安)하여야 되는 것이니, 약간이라도 흔들려 빈자리가 생기면 안된다. 만일 간격이 생겼다고 해서 돌조각을 덧끼워 받치려 해서는 안된다. 이럴 때는 잘 다져진 땅바닥이나 입사 기초된 부분으로부터 평평하게 고른 위에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야 동요될 염려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이치를 모르고 단지 고임돌로 주추를 고이고 밖으로 진흙을 싸발라 가리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주초 바닥이 비어서 물이 스며들면, 겨울에 얼어 부풀어 올랐다가 봄에 녹아 내리면서 가라않아 주추가 기울어지고, 심하면 기둥이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초를 놓는 일은 아주 신중히 해야 한다. 

고구려의 발달된 기법에 비하여 너무나 대조적인 양상을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였을 것이란 소박한 생각을 뒤흔드는 사상(事象)이다. 건축기법이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절정을 구가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사실이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b. c 3000년경에 이미 화강암을 떠낼 때 발달된 기법을 구사하였다 한다. 또 그런 자취를 오벨리스크를 다듬던 화강암 채석장에서  직접 보기도 하였다. b.c 1세기의 고구려의 일곱모 난 주초석 다듬는 일이나 5세기 이전 태왕릉의 둥글게 떠낸 석재는 인류가 발전시킨 기법의 유구함에서 충분히 가능한 작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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