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학자 임병식의 도닥거림] 경험이 부재한 사회의 막다른 길에서

임병식 | 기사입력 2025/12/14 [19:43]

[죽음학자 임병식의 도닥거림] 경험이 부재한 사회의 막다른 길에서

임병식 | 입력 : 2025/12/14 [19:43]

‘한 가지 길’로 강요하는 사회 

 

수능이 끝난 겨울, 교실 밖의 공기는 잠시 고요해진 듯 보이나, 실은 더 깊은 불안을 숨기고있다. 대학별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에게 “불합격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같다. “재수 말고는… 할 게 없어요.”

 

이 짧은 문장에, 나는 한국 사회가 걸어온 한 세대의 길이 응축되어 있다고 느낀다. 경험의 폭이 사라지고, ‘하나의 정답’만이 살아남은 사회. 죽음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는 ‘경험의 부정성’이 사라진 사회, 즉 실패와 우회, 실수와 모색이 더 이상 삶의 일부로 허용되지 않는 사회다.

 

재수생의 한 달 사교육비는 평균 350만 원에 육박한다. 한 해 4,000만 원이 넘는다. 대학등록금이 비싸다고 말해왔지만, 이제는 등록금보다 더 비싼 ‘재수 등록금’이 존재한다. 부모의 형편이 그나마 나은 집은 이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집안의 청소년에게 재수는 선택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죽음학에서는 ‘막다른 길’을 단순한 사회적 상황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방향감각이 무너지는 실존적 사태, 즉 ‘길 없음(no-way)’의 체험이다. 사회가 길을 잃은 아이에게 다른 길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자기 안에서 길을 끊어내고 만다. 자해, 중독, 극단적 선택, 고립… 이 모든 것은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길을 만들어 주지 않는 사회의 부정성이 청년의 몸과 마음으로 침투한 결과이다.

 

지금 한국에는 약 70만 명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청년’이 존재한다. 이 숫자는 경제 통계가 아니라, 문화적 비명이고 사회적 구조의 경고음이다. 우리는 이들을 ‘은둔형 외톨이’라 부르며 개인화하지만, 나는 죽음학자로서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이 사회는 얼마나 많은 문을 닫아왔기에 젊은이들이 스스로 방을 봉인하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문제의 핵심은 청년들이 게으르다는 데 있지 않다. 그들에게 선택지와 경험의 장(場)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 가지 길만이 ‘정상’이며, 한 가지 시험만이 ‘인생의 관문’이라고 말해왔다. 삶을 줄 세웠고, 직업을 줄 세웠고, 능력을 줄 세웠다. 그리고 그 줄의 뒤편에 밀려난 이들에게 “왜 서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죽음학의 관점에서 보면, 경험이 사라진 사회는 ‘죽어가는 사회’와 같다. 왜냐하면 경험은 존재를 열어젖히는 힘, 즉 ‘살아 있음’의 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실패할 수 없고, 휴식할 수 없고, 다른 길을 걸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이미 생명의 다양성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재수 외에는 할 것이 없다’는 청소년들의 말 속에서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스스로를 몰아왔는지를 직면해야 한다. 시험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상상력 자체가 붕괴한 것이 문제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말로 단 하나의 길만을 허락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경험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청년들이 스스로를 지우는 이 현실을 계속 방관할 것인가?”

 

죽음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는 사회란, 실패해도 괜찮은 사회이며,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열려 있는 사회다. 부정성(negativity)이 허용될 때만, 다시 긍정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교육 제도의 손질이 아니다. 청년 한 사람의 생애를 단선적 경쟁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획일적 가치 체계의 해체이고, 수많은 ‘경험의 장’을 사회 곳곳에 다시 복원하는 일이다.

 

아이들에게는 시험보다 넓은 세계, 정답보다 깊은 관계, 경쟁보다 풍부한 경험이 필요하다. 막다른 길에서 방향을 잃은 것은 청년들만이 아니다. 그들을 한 가지 길로 몰아넣은 우리 모두의 사회가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의 문제는 곧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생명력의 문제이자 미래의 문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경험의 지도를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임병식

철학박사.의학박사

한신대 휴먼케어융합대학원 죽음학 교수

한국싸나톨로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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