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해거리 / 박노해

서대선 | 기사입력 2025/11/24 [10:49]

[이 아침의 시] 해거리 / 박노해

서대선 | 입력 : 2025/11/24 [10:49]

해거리

 

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 사는게

미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 텃밭 산감나무는 25년째 그 자리에서 혹한과 폭설과 가뭄의 겨울을 견디고, 봄이 오면 싹을 틔운다. 무성한 이파리로 폭우와 긴 장마와 태풍과 변덕스런 여름 날을 건너고, 가을이 오면 아기 주먹만한 붉은 열매를 매달고 우리집으로 새들을 불러들인다. 가을 한철 산감나무는 마치 엄마 젖꼭지 같은 열매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물까치, 까치, 직박구리, 곤줄박이들을 먹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산감나무를 찾는 새들에게 말없이 제 열매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자연의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작년에는 “해거리”로 열매가 적어 새들의 성찬이 일찍 끝났었는데, 올해는 십이월이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붉은 열매들이 남아있어 새들의 멋진 춤사위를 볼 수 있다. 

 

“해거리(alternate bearing)”는 ‘격년결과(隔年結果)’라고 불리는 나무의 생존 전략이다. 열매 수확이 많은 해는 성년(成年), 적은 해는 휴년(休年)이라 한다. 성년에는 열매를 맺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어린 시인이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신의 집 감나무엔 감이 열리지 않았다고 “징징거리자” 시인의 어머니는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며 삶의 이치를 알려주셨다. 나무에게 열매란 모든 것을 희생해서 얻는 결과이다. 감나무는 성년에 많은 열매를 맺기에 해거리를 통해 열매 맺는 생산 활동을 멈추고 에너지를 비축하며 휴식을 취한다. 

 

해거리는 나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전략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해에 겉으로 보기엔 그냥 이파리만 무성한 채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는 그 기간 동아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내실을 다진다. “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는 말에 어린 시인은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나무 밑에 엎드려서/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며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는 삶의 지혜를 배웠으리라.

 

해거리하는 나무들의 생존 전략을 보며 자연스런 삶의 모습이란 항상 전력 질주하는 삶이 아니라 때로는 속도를 늦추고 삶의 이면(裏面)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잊고 있던 소박한 일상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삶의 균형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을 일깨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한 번씩 제자리에 멈춰 선다고 한다. 육체가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 조용히 뒤를 돌아보며 제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감나무의 해거리 전략은 오늘날 끊임없이 성과를 내야만 하고, 바쁘게 살지 않으면 세상에서 도태될 것만 같아 불안해하다 결국 번 아웃(Burn Out)에 빠지는 현대인들에게 의도적인 멈춤과 휴식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 역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목표했던 성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시기를 성장과 준비의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기반을 다지는 태도가 더 단단한 삶을 만든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무리한 욕심을 버리고 감나무의 “해거리”처럼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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