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사 미스터리, 계엄은 왜 선포됐을까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25/04/21 [09:36]

현대정치사 미스터리, 계엄은 왜 선포됐을까

최병국 기자 | 입력 : 2025/04/21 [09:36]

지난해 12월 3일 밤은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던 날이었다. 그러나 윤석열 당시 대통령은 오후 10시 23분경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던 중 갑작스럽게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계엄 선포의 후폭풍으로 윤 대통령은 탄핵 소추됐고, 헌법재판소는 지난 4일 그를 파면했다. 이에 따라 오는 6월 3일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당시 계엄 선포는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가 아닌 상황에서 이뤄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며, 헌법상 대통령에게 국회를 해산할 권한도 없고, 국회 재적 의원 과반의 해제 요구 시 즉각 해제해야 하는 규정이 존재하기에 성공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였다. 그럼에도 법률가 출신인 윤석열 대통령이 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 문화저널21 DB

 

총선 참패 후 계엄 구상?

협치 외면과 아집이 불러온 결과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0.73%p 차로 신승한 뒤, 같은 해 6월 1일 치러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17석 중 12석을 확보하며 지방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윤석열 정부는 제22대 총선 승리를 통해 국회 제1당을 탈환, '완성형 윤석열 정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모든 정책과 정치적 초점이 총선 승리에 맞춰졌다. 하지만 2023년 10월 11일 치러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 김태우 후보가 민주당 진교훈 후보에게 17.15%p 차로 대패하자, 위기감을 느낀 윤 대통령은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을 퇴임시키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발탁해 선거를 진두지휘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내건 핵심 메시지는 정책이 아닌 ‘이재명 심판론’이었다. 선거 승리를 위해 의료개혁, 김포 등 서울 인접 지역의 서울 편입 공약, 윤 대통령의 지방 민생토론회 개최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민심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윤 대통령이 약속한 지역 개발 공약을 실현하려면 1,000조 원 이상의 재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현실성 논란도 있었다.

 

선거 10여 일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의 의석수는 95~98석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됐고, 이에 선거 막판 국민의힘 지도부는 민주당의 200석 돌파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 선전하며 최종적으로 108석을 얻었으나, 총선은 사실상 참패였다.

 

이처럼 참혹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은 사고의 전환을 통한 협치 대신 아집을 강화하며 결국 비상계엄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정황상 윤 대통령은 총선 직후부터 이미 계엄 선포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난해 12월 4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에는 여전히 경찰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 ©이한수 기자

 

'이재명만 제거하면 정권 재창출 가능’

계엄의 진짜 목적은?

 

윤 대통령의 측근으로 평가받던 고(故) 장제원 전 의원은 생전 2023년 2~3차례 협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정무장관직 신설을 제안했지만, 오히려 핀잔만 들었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의 사고에는 협치보다는 ‘이재명만 제거하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의 선배인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자신의 후계 구도를 완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김영삼은 자신이 지지한 이회창 후보에게서 배신을 당해 탈당했고, 김대중 역시 노무현 후보의 선출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물며 정치 초년생인 윤 대통령이 후계 구도를 설계해 나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선에서 경쟁했던 상대 후보에게도 관용을 베풀며 협치의 파트너로 삼았다. 김대중은 14대 대선 패배 후 김영삼을 피해 영국으로 떠났지만, 귀국 후 그의 비자금 수사 유보 등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이후 여야 대표 간 영수회담을 8차례나 갖는 등 협치로 정국을 이끌었다.

 

이에 반해 윤 대통령은 이재명을 범죄인으로 간주하며 대화 상대로조차 인정하지 않았고, 집요한 수사를 통해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총선에서의 패배로 민심의 냉혹한 심판을 받은 후에도 국면 전환을 위해 감사원장과 서울중앙지검장 탄핵을 앞두고 무리하게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준비되지 않은 돌발행동이었으며,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과 비교되기도 한다. 두 사건 모두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고, 돌발적이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계엄 선포와 대통령 시해

풀리지 않는 현대사의 미스터리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말하며 구국적 결단이었다고 주장했고, 윤석열 전 대통령 역시 12·3 계엄 선포가 "평화적 대국민 메시지"였다고 주장하며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주장은 체포 혹은 실패 이후에 나온 자기방어적 논리에 불과하며, 그 결정의 배경에는 여전히 수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우리 헌정사에서 마지막 계엄은 1981년 1월 제5공화국 출범 직전 해제된 이후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심지어 철권통치를 했던 전두환조차 1987년 4·13 호헌 조치 당시 비상계엄 선포를 추진했지만, 군부의 반발로 백지화했다. 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은 어떤 의견 수렴도 없이 갑작스럽게 계엄을 선포해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다.

 

만약 계엄 선포의 진짜 목적이 이재명 대표 제거에 있었다면,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번 사건은 단지 한 정치인의 무리한 결정이 아닌, 현대사에서 쉽게 풀리지 않는 커다란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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