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건청 시인, 83세 노시인이 쏘아올린 눈시린 시간풍경

최재원 기자 | 기사입력 2025/03/24 [11:03]

[기획] 이건청 시인, 83세 노시인이 쏘아올린 눈시린 시간풍경

최재원 기자 | 입력 : 2025/03/24 [11:03]

미래시대의 ‘이건청 시전집’ 이후 새로운 도전의 결실 

 

최근 출간된 시집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가 문단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시집의 주인공은 바로 이건청 시인. 올해 만 83세의 그는, 연령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적 세계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이번 시집은 나이와 상관없이 오히려 더 활기차고 도전적인 시적 언어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건청 시인은 이번 시집을 두고 “내 나이 만 83세에 나온 작품이라 스스로에게도 깊은 감회를 준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시인들이 70세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시 창작에 대한 열정이 줄어드는 현실을 언급하며 "노년에는 육체가 노쇠해지고 감각의 촉수도 무뎌지며, 언어의 환기력과 상상력도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집은 그가 79세였던 2021년에 펴낸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 이후 더욱 깊어진 도전의 결과물이라고 밝혔다.

 

이건청 시인은 지난 2022년 자신의 평생 작품을 총정리한 ‘이건청 시전집’을 간행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시전집을 출간하면서, 이제 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 고(故) 박목월 시인의 조언이 번개처럼 떠올랐다고 말한다. 박목월 시인은 그에게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때가 바로 시인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이다”라고 당부했었다고 한다. 이 조언이 그를 다시 시 창작의 세계로 돌아오게 했고, 그 결실이 바로 이번 시집이라고 설명했다.

 

▲ 이건청 시인이 (사)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역임하던 2011년 당시 본지와 인터뷰하던 모습  © 최재원 기자

 

이번 시집은 독특한 시적 성취로도 평가받고 있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시집이 38억 년이라는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동시에, 태양계에서 250억km나 떨어진 우주로 공간을 확장하는 시도를 보여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에 이건청 시인은 “이번 시집은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처절한 도전의 결과물”이라며 “남들이 쓰지 않은 새로운 소재와 방법을 찾으려 일부러 힘든 길을 택했다”고 밝혔다.

 

통상적으로 시인의 관심사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그는 인간이 발을 딛지 못한 시간과 장소까지 '시적 현실'로 끌어들였다. 38억 년 전 생명의 시작부터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먼 미래까지 상상력을 확대하며, 시의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그의 도전은 우리에게 나이와 세대를 넘어 끊임없이 상상력의 경계를 허물고 창작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제 그의 시는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새로운 시의 전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최재원 기자

 

<일문일답 형태와 인용형태의 인터뷰로 내용을 옮깁니다>

 

# 지질시대와 역사시대의 시

 

과거의 시간, 미래의 시간을 시적 현실로 표현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나가버린 38억년의 시간은 어떻게 시작 대상으로 불러올 수 있을까요

 

“46억년 전 처음 지구는 물로 가득 차 있었고, 수시로 외계 행성들이 충돌, 화산 폭발이 계속되는 불안정 상태였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지구가 안정화되면서 겉껍질이 만들어진 것이 38억년 무렵이었지요. 이후 25만년 지구상에 현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하고 인간에 의한 역사 기록이 남기 시작한 1만년 이후를 역사시대라 부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지구의 시간은 지질시대와 역사시대로 나뉘게 되지요. 1만년 이전 지질시대의 지구 역사는 지구의 지질자료 속에 남았으며 38억년 이후 지구가 겪은 화산폭발, 충돌등도 지질 암반 자료 속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기고 있다습니다. 특히, 지구의 각종 퇴적암들이 세세한 화석 자료들을 품고 있습니다. 각종 화석들과 화산폭발 들도 암반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지구가 겪은 각종 변화의 모습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인간이 남긴 각종 기록이나 그림자료들은 인간이 겪은 실제 역사를 알려줍니다. 인간이 남긴 실제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역사의 시대를 ‘역사시대’라 부릅니다. 역사시대의 시발점이 되는 때가 약 1만년 전쯤입니다. 그러니까 첫 생명이 지구에 나타난 38억년에서 1만년 까지의 시대를 지질시대라 부르고, 인간이 남긴 기록물이 등장하는 1만년 이후를 역사시대라 부릅니다.”

 

지구의 역사의 대부분은 지질시대이고, 이 시대의 역사는 화석 자료나 바윗돌의 성분 무석을 통해 찾아야 하겠네요.

 

“그렇습니다. 지질시대의 역사가 지구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화석학, 지질학, 인류학, 천문학 등의 자료를 찾아 헤매곤 하지요. 나는 지구 발전과 생명 발전의 구체적 실상들을 찾기 위해 수많은 화석 자료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지구의 변화양상을 알아보기 위해 숱한 바위지대와 암반 벼랑을 찾아다니기도 했답니다.”

 

누억 년 시간이 쌓여

돌이 되어 있다.

20억 년쯤의 시간 위에

다른 시간이 덧쌓여 퇴적암을 이루고

시간의 퇴적 위에 10억 년쯤의

어느 햇살 밝은 날이 다시 쌓이고

배고파 벼랑밑에 잠들었을

초식 공룡도 한 마리

화석으로 남았거니

순담계곡에서 드르니 계곡 쪽으로

3.1km 잔도棧道를 따라 걸으며

지나간 시간이 첩첩이 쌓인

누억 년 바위 벼랑을 돌이켜 바라보느니

켜켜이 쌓인 바윗돌 속

지나간 영겁의 시간이 건네는

연둣빛 안녕 소리를 나는 듣느니

오호라, 오늘은 한탄강 지질공원

드르니 계곡길이나 걸을거나

우뚝우뚝 벼랑을 이룬 누억 년 시간,

드르니 계곡 길을 따라 걸으며

언젠가,

나도 가 묻힐 저 벼랑의 시간 속,

눈짓 인사 나누러 갈까.

 

* 드르니 계곡: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소재 한탄강 지질 공원의 일부.

한탄강 3.1km 잔도 길의 한쪽 입구.

― 「한탄강 지질공원에서」 

 

▲ 이건청 시인의 한탄강 지질공원에서 中  © 최재원 기자

 

“우리나라 한탄강 유역은 장구한 지질변화 양상을 직접 볼 수 있는 최적의 자원입니다. 이곳이 [유네스코 한탄강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세계적 지질자원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한탄강 유역에는 20억~7억년 전(선캄프리아 기)의 변성암, 2억년 쯤 전의 퇴적암, 화강암등이 쌓여있지요. 

 

그런데, 이 지역에 그후 50만~16만년 전 2번에 걸친 대규모 화산 폭발이 있어 솟구쳐 오른 엄청난 용암이 그 위를 덮었답니다. 현재의 철원, 연천, 전곡 지역이 그곳입니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물 흐름이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만나보는 한탄강의 절경이 생겨났어요. 

 

선캄프리아기 암반 위에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이 덮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놀라운 경치로만 보고 있는 한탄강 유역의 암반벼랑들이 사실은 지질시대 지구의 역사 현장임을 기억하고 보면 참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탄강 드르니 계곡에 서서 건너편 벼랑을 바라보면 몇 억 년의 시간, 지층들이 시루떡처럼 쌓여있는 걸 볼 수 있지요. 한층 한층이 수억년 시간인 저것들이 누군가의 호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질시대 지구의 변모 양상들은 지질시대에 축적된 돌 속의 화석이나 돌의 성분분석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나는 틈만 나면 한탄강 지질공원을 찾아다니면서 몇 억년 전 지나가버린 시간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소통을 시도해보곤 합니다”

 

# 250억km밖 미래시대의 시

 

이번 시집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이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시간까지를 시 속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저는 미국 NASA에서 발사한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와 2호가 태양계 탐사를 마친 뒤, 태양계를 감싸고 있는 오르트 구름을 지나 무풍지대인 심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77년 8월과 9월에 각각 발사된 이 보이저 탐사선들은 지금도 오르트 구름을 지나 초속 약 15km의 속도로 광막한 우주를 가로지르며 전파 신호를 지구로 보내오고 있다고 합니다.”

 

1977년 발사된

우주탐사선 보이저호*에는

불시에 만날지도 모를 외계인을 위한

‘외계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다.

금 도금 30cm 크기의 디스켓엔

115개의 지구 이미지 그림과

파도, 바람, 번개, 새, 고래와

동물들이 내는 소리,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의 음악,

그리고, 지구 55개국어의 인사말들이 담겼다.

외계행성의 그대들아,

지구인들이 내민

이 손을 잡아다오

망극한 이 손을 잡아다오

80억 인류가 건네는

지구 이미지들을, 암호를,

구명 신호를,

그대들이 피와 살과 뼈 아닌 생명이어도

와서 열어다오,

들어다오

감싸다오

그대들, 오순도순 우주 가족 마을

문을 열어다오

잡아다오.

80억 지구인들이 내민

망극한 이 손…

 

* Voyager: 미국 NASA가 1977년에 발사한 우주탐사선 1호와 2

호. 어디선가 만날수도 있을 외계인들에 보내는 디스켓 편지를 싣

고 있음. 탐사선은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 외우주 250억km를 가며

지구로 전파 신호를 보내오고 있음.

-「편지」 전문

 

▲ 지난 2022년 이건청 시인(한양대 명예교수)이 '이건청 시전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시인들에게 감사인사와 함께 이건청이라는 시인을 되짚어보는 소회를 전하고 있다.

당시 출판기념회에는 우리 시단의 역사로 불리는 김남조 시인(제24대 한국시인협회장)을 비롯해 오세영 시인(제35대 한국시인협회장), 허영자 시인(제32대 한국시인협회장), 오탁번 시인(제36대 한국시인협회장), 김종해 시인(제34대 한국시인협회장), 이윤기 전 도산서원·병산서원 원장, 유자효 시인(현 한국시인협회장), 윤석산 시인(제42대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제33대 한국시인협회장) 등 원로시인과 젊은시인 100여명이 참석해 별들의 축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 최재원 기자

 

이건청 시인의 ‘편지’는 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외계인에게 보내는 ‘구명신호’라 부르고 있으며, 그 구명신호의 여실함을 ‘80억 현생 인류가 보내는 망극한 이 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는 지나가버린 38억년~1만년 사이의 장구한 시간을 알고 싶고, 화석으로 굳어있는 동식물들과도 소통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도 태양계를 벗어난 보이저 1호 탐사선은 공기저항이 없는 우주공간을 빠르게 달려가면서 지구로 탐사신호를 보내오고 있다고 합니다. 250억km 밖, 빛의 속도로 22시간쯤의 거리를 달리며 우주 정보를 지구로 송신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석 자료나 암반 벼랑으로 굳은 과거의 지질자료들을 깊게 보고, 우주의 무한공간을 탐색해가는 미래시간 자료들을 깊게 보면서 현생 인간으로서의 ‘나’를 찾는 시의 길을 헤매다니면서 낯선 시간과 공간이 건네주는 희열과 만나고 있습니다.”

 

물리적 한계를 넘어 지질시대와 미래시대를 넘나드는 선생님의 시적 탐험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기쁨과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시적 황홀을 담은 시편들로 독자들과의 깊은 교감을 이어가 주시길 기대합니다.

 

문화저널21 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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