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된 지도 벌써 20일이나 지났다. 세상에나. 시간이 ‘슈-욱!’ 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간 것 같다. 연말이 되면 꼭 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열 몇 살 때부터 해왔으니까, 벌써 꽤 오래된 나만의 의식이다. 바로 ‘비전 보드 만들기’. 내가 처음 이걸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정도로. 유튜브만 검색해도 비전 보드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내용은 수두룩하지만, 간단하게만 설명해보자면, 원하는 걸 생각하고, 그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 오려 붙이고, 글을 적는 행위이다. 이때 아주아주 중요한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첫 번째는 절대 자기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않는 것이며, 둘째, 그것이 진짜로 마음속에서부터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 만들었다면 잘 보이는 곳에 커다랗게 붙여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면서 그 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해보면 된다.
”쓰면 이루어집니다.“
십 대 때 처음으로 비전 보드를 만들 때는 이런 식상한 멘트를 믿고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도 있다. 지난 한 해는 어땠는지,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반성할 점은 무엇인지 정리도 해보고, 다가올 한 해는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무엇을 중점에 두고 움직일 건지를 생각한 다음, 그걸 가시화하는 새해의 다짐 같은 의미가 있다.
24년 연말은 손님을 치르느라 참 바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마무리는, 여러 가족이 제주도를 방문하는 바람에 시끌벅적하게 많이 웃으면서 마무리되었다. 단조롭게 보내던 생활에 좋은 에너지들을 마음껏 서로 나누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다만, 혼자 조용히 정리할 시간이 없어, 나만의 의식인 2025 비전 보드 만들기는 25년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늘, 12월 한 달 동안 천천히 생각하고 만들었었는데, 조금 늦었지만 올해도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 비전 보드는 예년과 좀 다르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바로 조카와 함께. 조카와 같이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예전에 내가 만들었던 비전 보드들을 아직 가지고 있는데, 십 년도 넘게 된 것들을 꺼내 보면 신기하게도 몇 가지 항목들을 이미 이루었거나, 이루어가는 과정들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정작 그걸 만들었을 때는 왜 그걸 이루고 싶었는지도 이유도 정확히 없었고, 그저 동경의 대상이라 적어두었거나, 얼토당토않게 이걸 하겠다며 써둔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들여다보면, 그중 많은 부분이 이미 이루어져 있어 신기하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때 써둔 ‘외국에서 1년 살아보기’, ‘책 쓰기’ 같은 건 벌써 이뤄진 지 오래고, ‘ 5개국어 마스터하기’ 같은 20대 초반에 적은 내용은 현재 반이 좀 넘게 달성한 것 같다.
오랜만에 가장 오래된 10대 때 써둔 100가지 가까이 되는 리스트를 들여다보니 그중 절반도 넘는 항목은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런 발견은 늘 기쁘다. 나의 그런 경험들을 조카에게 공유해 주고 싶었다. 이제까지는 너무 어려서 좀 미뤄두고 있었는데, 열 살이 되었으니 이제는 같이 할만하다 싶어, 종이와 색연필을 들고 오라고 했다. 인형 놀이가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내가 같이할 일이 있다고 하니 뭘 하려는 거냐며 시큰둥하게 종이를 들고 온 조카에게 말했다.
“자, 지금부터 이모랑 같이 이번 한해에, 네가 해보고 싶은 일이나, 가지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일들을 한 10가지 생각해 보는 거야. 너무 많은 것 같으면 5가지만 생각해도 되. 그리고 네가 생각한 그 일들은 그림으로 그려보고 그 아래다 글을 적으면 돼. 어때? 같이 해볼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그리고 노는 것 같으니 시큰둥한 표정은 어디로 가고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종이 가운데에다 2025라고 녹색이며 분홍색이며 여러 가지 색깔로 덧칠을 해가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나씩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그려나갔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1. 피아노대회 1등 하기 (할 수 있어!!!) 2. 이모가 강아지들이랑 유튜브 스타되기 (아니, 왜 니가 아니고 내가?) 3. 뮤지컬 하기 (안되면 집에서라도 해봐야겠다...) 4. 손에 매직 생기기 (엇.. 이건...) 5. 가족 건강하기, 행복하기, 복 많이 오기 (아이구, 이뻐라!!) 6. 아지, 아톰 건강하기 (그럼그럼~) 7. 수학 똑똑이 되기 (너는 똑똑하니까 잘 할거야~)
여러 가지 색을 바꿔가며 색연필로 그리고 쓰기를 한참. ‘짜잔~’하고 보여주는데, 저런 것들이 적혀있었다. ‘손에 매직 생기기는 뭐지?’ 내심 궁금했지만 그런 건 아마 안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혹시 아나? 초능력자들도 있다는데 될지도? 하하. 어른들이 생각하는 비전 보드 말고, 그냥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창의력이 돋보이는 비전 보드에 손대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바를 마음껏 꿈꾸며 그 시간을 즐기게 두었다. 자기가 만든 걸 막 자랑하더니 내 것을 보여달란다. 그래서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각자 방문 앞에 붙이기로 했다. 올해 12월이 되었을 때, 우리 얼마나 이루게 되었는지 같이 보자고 약속했다.
앞으로 매년 12월마다 이 일은 같이 해보려고 한다. 내년부터는 가족들과 전부 같이하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시작하면서 같이 책상에 앉아 원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고, 이미지를 찾아 붙이거나 그림을 그리고, 그 아래 글을 적어가면서, 자신만의 꿈을 그려가는 과정을 오래 경험해보니 참 기분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이 비전 보드를 만들 때 조카는 내내 신나서 웃는 얼굴이었다. 그림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해가며, 마치 자기가 이미 그것을 가진 것처럼 깔깔대며 그려나갔다. 그래, 내가 원하던 게 바로 딱 그 지점이다. 되든 안 되든 그렇게 원하는 바를 상상 속에서 마음껏 펼쳐보고 하나씩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 일단 반은 성공이다. 과연 올해 말이 되었을 때, 조카도 나도 얼마나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을지 벌써 궁금해진다. 연말 결산, 즐거운 마음으로 공개해볼 생각이다. 2025년 12월 개봉박두!
아, 그리고 조카의 소원처럼 모두의 집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복도 많이 받으시길!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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