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유전공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순전히 고등학교때 보게된 책 한 권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이던가, 그때 한참 인기를 끌었던 로빈 쿡의 소설 돌연변이.
당시 비슷한 류의 소설에 빠져있던 나는 생명과학이라는 분야가 무척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결국 나는 유전공학과로 진학을 결정했다. 1학년때 각종 전공필수 과목들을 이수하고 2, 3학년이 되었을때 비로소 유전학을 듣게 되었는데, 수업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교수님이 설명하시던 모든게 너무너무 신기했으니까.
대학원에서는 뇌신경과학을 전공했다. 당시는 시험을 보고 들어가면 내가 실험을 하며 지낼 방이 알아서 배정이 되었다. 내가 배정된 방은 전기생리학을 연구하는 연구실이었다. 그곳에서는 학과과목을 이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실험을 하는데 사용했다. 그때 우리의 실험대상은 흰쥐였는데, 당시 스트레스관련 실험을 했었다. 학부때 배운 내용을 토대로, 이제는 어떤 문제에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학부, 대학원의 모든 강의를 통틀어 내가 가장 놀라고 경이로웠던 순간은, 유전학 수업시간에 배운 DNA의 교정시스템(proofreading system)이다. 우리의 세포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죽고 새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나려면 DNA라고 불리는 유전자 복제는 필수요소다.
유전자 복제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우리 몸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고등학교때 생물시간에 배웠듯이, 염색체의 개수는 세포 하나에 무려 23쌍씩 존재하고, 한 개의 염색체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DNA가 들어있다. 한개의 DNA를 길게 펴면, 그 길이는 약 2m에 달한다고 한다. 인간의 DNA를 모두 연결하면 명왕성에 도달할 정도의 길이가 된다고하니, 그 길이가 얼마나 긴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긴 유전자복제가 일어날때는 두가닥으로 꼬인 나선구조로 되어있는 DNA가 풀리면서 원본 DNA를 가지고 새로운 두 개의 DNA를 만들어 낸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이 아는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길이를 새로 만들어내는데, 늘 완벽할까? 우리도 일을 하다보면 간간히 실수를 하는데, 유전자도 똑같이 여러 이유로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물론 유전자도 복제되는 과정에서 실수를 일으킨다. 복제과정에서 실수가 일어나면 그 부분은 원본과 달라지므로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이렇게 손상이 된 유전자를 원래의 DNA서열로 회복되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글자가 틀렸을때 교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몸에는 이럴때 사용하는 기가막힌 시스템이 하나 존재한다. 바로 교정시스템(Proofreading system)이다. 복제가 되는 과정을 뒤따라가면서, 복제중에 오류가 생긴 부분을 인식하고, 잘못된 부분을 삭제하고 원본과 같게 교정해주는 시스템이다. 처음 이것을 배웠을때 정말 깜짝놀랐다. 내 몸속에서 이렇게까지 정교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이것말고도 유전자의 오류를 인식하고 바로잡는 여러 방법들이 있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존재인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유전자가 마치 신처럼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이라는 학문은 뭔가 새로운 것을 개발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다. 생물학, 유전학도 그렇고, 물리학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런 분야의 과학은 신의 생각, 또는 마음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종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도, 우리몸도, 우주 전체도, 그 안을 이루고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도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소름 돋을만큼 완벽한 원리들에 의해 돌아가며, 거기에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차가 있고 오류가 생긴다면 그 존재는 소멸하고 만다(늘 그런것은 아니다). 이렇게 완벽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고 자연스레 삶을 영위한다.
내가 탄생의 순간부터 계속 내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교정시스템(Proofreading system)에 대해서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게되었던 것처럼, 이토록 거대한 세상의 1%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모든 것의 마지막 대답은 ‘모른다’ 로 향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부하고 배우고 경험했는데, 그 모든 끝이 모른다라니. 정말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모른다’ 가 정답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연스레 그 해답을 찾기위해 인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있어 보이는 것 같겠지만, 실제로는 인문(人文), 즉 인간과 인간이 향유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모르는 것들에 대한 열린 대답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문학은 스스로 사고하고 비판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배우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 정답이 없거나 모호한 질문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열린 질문들은 인간에 대한, 만물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다.
삶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모든 문제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걸 느끼고 있다. 하나의 정답이 있기보다는 여러 다른 해답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쩌면 이런 삶의 공부는 조선시대 시서금주(詩書琴酒)를 즐기며 자연과 사람에게 삶을 빗대던 선비들과 닮아있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에도 어쩌면 딱 떨어지는 대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럴때는 살짝 인문(人文)에 기대어 나의 정답과 너의 정답을 나누어보면 어떨까. 모른다는 것이 당연해지면 좀 더 그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가능성의 폭이 열려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홍사라의 풍류가도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