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연히 알고리즘에 이끌려 어떤 동영상을 보게 됐다. 그 영상에는 스님, 신부님, 목사님, 원불교 교무님 네 분에서 ‘만남’이라는 이름의 중창단을 만드셨는데, 이 모임을 통해 사람들의 고민도 들어주시고 노래로 위로를 건네는 활동을 하고 계셨다. 각자의 믿음이 다른데 하나로 모여서 활동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가능한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만남 중창단은 2022년 만들어졌다고 하니 벌써 2년이 되어가는 모임이었다. 중창단을 꾸리기 전부터 각자, 또는 같이 방송 활동도 많이 하셨는지라 자료가 꽤 있었다. 저 신박한 조합이 너무 궁금해서 관련 영상을 모두 찾아보았다.
그러다 오은영 박사와 김창옥 님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방송을 보게 되었다. 일단 성직자가 그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쇼킹했다. 오은영 박사의 프로그램은 현재 자신의 문제점을 밝히고,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며 원인을 알아내고 어떻게 해야 나아질 수 있는지 일종의 정신감정 내지는 멘탈관리를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김창옥 쇼는 다양한 갈등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방송이고. 사회적으로, 또는 종교 공동체 내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성직자들이(심지어 그들은 직업상 상담도 많이 해 주신다) 어떻게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을까, 참 신기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방송분과 오은영, 김창옥 쇼까지, 그간의 방송을 모두 보고 나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그분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말하는 어조와 태도, 그리고 그 내용까지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동시에 특별했다. 부모와의 불화 같은 많은 사람이 겪어본 힘들었던 과거를 그들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깊이와 풀어내는 방식이 달랐다. 이분들이 고통을 풀어가는 방식을 정신과에서는 방어기제의 일종인 ‘승화’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조금 찾아보니 승화라는 것은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이나 충동에 직면했을 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그것을 완화하는 방법으로, 프로이트는 승화를 ‘문명의 기초’라고까지 표현했다고 한다.
그분들이 같이 활동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상담을 해주는 방송에 나올 수 있는 것도, 과거의 자신을 승화로 잘 풀어내고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그 본질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섞여 들어갈 수 있고,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던 이유가 그런 바탕에서 나온 유연함이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유연할 수 있다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이 오랜 시간 수행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일종의 깨달음이 있었을 테고, 어찌 보면 고단했을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본질에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멘탈케어를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자신의 멘탈을 점검받는 곳에가서 자기가 겪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종교는 다르지만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넘어, 정치사상을 넘어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유연하고 깊은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과 반대되거나,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과도 말을 섞을 줄 아는 사람들도 그렇고. 이들은 다름을 인정할 줄 알고, 나의 감정이 요동치더라도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줄 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거나 ‘내 것이 더 낫고 네 것은 내 것보다 못하다.’라는 우월감에 가득 찬 사고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와 다르더라도 그 다름을 보고 들을 줄 알고, 상대의 말에 공감할 줄도 알고, 그 다름에서 좋은 부분을 찾아내거나, 같은 부분을 짚어내며 즐거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설사 그들이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본질을 알기에 ‘내가 너보다 많이 알고 있으니 어디 한번 말해봐’ 와 같은 고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권위는 세우고 싶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감정이 드는가? 우리는 종종 그 사람들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반감을 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척할 뿐 진정으로 그들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권위라는 것은 그만한 실력은 갖추었지만 내가 그것을 내세우려 하지 않고, 그 사람만의 아름다운 색이 온몸에서 배어 나올 때 자연스레 세워지는 것 같다.
처음엔 신기해서, 다가가다 보니 매력적이어서, 그러다 보니 부럽고 닮고 싶어서 누군가를 추앙하고 그로부터 진정한 권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이 권위를 세우고 싶을 때, 상대방보다 자신의 자세를 뻣뻣하게 높임으로서 스스로 그것을 얻으려 한다. 그렇게 자신을 권위 있는 사람으로 받들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권위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려 하지 않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그동안 자신이 깨달은 바를 가감 없이 말하는 저런 태도가 많은 사람의 같이 활동할 수 있게 하고, 공감을 얻어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참 닮고 싶은 부분이다.
김창옥 님이 이런 말을 했다. ‘사고의 유연함은 자기 존재의 자신감에서 나온다.’ 본질을 아니까 어떤 틀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했다. 본질을 알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극상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개인화가 심해지는 세상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기를 멈추고, 나의 에너지를 소비한다고 생각되는 종류의 대화를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오늘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신 스님, 신부님, 목사님, 교무님, 저런 분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반갑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로 나도 잘못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고, 각 종교에 대해, 사람에 대해 조금 더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본질이나 유연함은 가지고 싶다고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립이 있거나 이해가 가지 않을 때, 배타적인 생각은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조금씩 그것에 다가가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분들의 그 유연함을 조금은 닮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그 본질이라는 녀석과 마주하는 멋진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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