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라의 풍류가도] 별일 아니다

홍사라 | 기사입력 2024/02/21 [13:29]

[홍사라의 풍류가도] 별일 아니다

홍사라 | 입력 : 2024/02/21 [13:29]

제주에 내려온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지난 두 달 동안 일을 보느라 서울에 2~3주에 한 번씩 다녀왔다. 두 달 동안 서너 번 정도 다녀온 것이다. 헌데 참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1월 말쯤 서울에서 볼일을 다 보고 나서 제주로 내려가려고 짐을 싸는 중이었다. 사실 전날부터 안전재난문자도 오고 눈이 오는 게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뭐 눈은 종종 오니까. 그런데 갑자기 날아온 문자 한 통.

 

‘ 금일 00 항공, 2024년 1월 00일 출발 김포-제주 편 0000편 결항 안내해 드립니다. 결항 사유….’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내가 예매한 항공사 말고도 모두 다 결항이니, 내일 비행기라도 예매해야겠다 싶어서 예약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내일모레 오전까지 예약이 가능한 비행기가 없었다. 오늘 비행기가 무더기로 결항되었으니 나 같은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간간히 비행기가 뜨기는 했지만 결제를 하려고 하면 이미 예약이 된 상태라 예약 불가하다는 안내가 떴다. 아. 난감했다. 아무리 멀어도 육지라면 차를 달리든 기차를 타든 방법이 있을 텐데, 섬은 이런 곳이구나 새삼 알게 되었다. ‘발이 묶인다’라는 말만 들어봤지 내가 실제로 발이 묶여보니 ‘그게 이런 뜻이구나.’ 싶었다.

 

©홍사라

 

그날 하루종일 핸드폰에 파묻혀 표가 있나 알아보느라 잠도 못 자고, 새벽까지 광클을 해서야 겨우 다음날 오후 늦게 출발하는 한 좌석을 예매할 수 있었다. 예매에 성공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날씨가 걱정이었다. 다음날 눈은 그쳤지만, 전날 발이 묶였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다 보니 공항은 인산인해였고, 비행기는 줄줄이 다 지연되었다. 내가 예약한 비행기도 오전부터 지연문자가 계속 와서 과연 이 비행기가 과연 오늘 안에 뜰 수 있을까 했다.

 

가족들은 천재지변이니 뭐 어쩌겠냐며 마음 편히 며칠 더 있다 오라고 했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두고 온 강아지도 걱정이고, 강아지를 며칠 더 돌봐달라 부탁을 해야 하니 그것도 부담스럽고, 이래저래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좌불안석이었다. 그날 어찌어찌 늦은 시간까지 바쁘게 움직여 겨우 제주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다음부터는 눈, 비 예보를 잘 챙겨보고 다니리라 다짐하기도 했고, 이런 일은 뉴스에서나 봤으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거라 스스로 위안도 했었다.

 

그런데 어제. 이번엔 가족들이 새해를 맞아 제주로 여행을 온 터라 올라가는 길에 같이 올라가려고 모두 같은 날짜로 예매를 해두었다. 오전부터 살살 정리를 하면서 공항에 갈 준비를 했다. 온가족이 심한 감기에 걸린데다 아이도 있고 하다 보니 짐을 싸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짐 정리가 끝나고 시간이 되어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가려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가시거리가 50미터도 나오지 않는 정도의 짙은 안개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았지만, 눈이 와서 미끄럽거나 폭우, 강풍은 아니니까 비행기가 지연되는 정도겠지 생각했다.

 

도로에 있는 차들은 모두 앞이 보이지 않아 비상등을 켜고 40킬로 이하로 서행 중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조심조심 운전하다 갈림길이 나와 네비게이션을 보는데 문자가 왔다는 알림이 띠릭 떴다. 미리보기로 볼 수 있는 부분을 읽어보니, ‘안녕하십니까? 00 항공입니다.’로 시작하는 문자였다. ‘ 아, 역시 지연되는구나. 그래 이 정도로 앞이 안 보이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뒷골이 싸한 것이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받은 알림을 열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00 항공입니다. 2024년 2월 00일 20:00 출발 제주-김포 0000편 결항을 안내드립니다. 결항 사유는 가시거리 미확보, 김포행 항공기는 제주공항 저시정으로 인해 결항되었습니다. 금일 결항으로 인해 해당편은 7일간 차액 없이 여정변경이 가능하며…….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세상에. 짙은 안개로 인해 결항이 된 것이다. 같이 가고 있던 가족들도 연달아 모두 같은 문자를 받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항공사도 거의 다 결항이었다. 우리는 이미 공항 근처까지 와있었는데, 비행기가 못 뜨는 상황이라니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결항은 확실하고 지금 상황이 어떤지 내일은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비행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추이를 보려고 참고하는 곳이 있다. 지난번 폭설 때 알게 된 곳인데, 포털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오픈 채팅방이다. 거기 들어가서 보니 결항으로 인해 발이 묶인 사람들이 각자 그곳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세시 이십 분 비행기 기다리고 타고 있는 상태로 출발 못 했어요 ㅎㅎ..그래서 지금까지 대기하다가 내립니다. ㅋㅋ 오후 4; 53’

 

‘어제저녁 뱅기 회항 당하고 오늘은 결항 당했네요 ㅠㅠ’

 

‘지인은 김포-제주인데 3시간째 못 내려요. 다 회항해서 기내에서도 김포공항에 다 순차적으로 내리느라 못 내리고 있다네요.’

 

제주에 들어오려는 사람들도 제주를 나가려는 사람들도 모두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절대 안 뜬다, 포기해라, 빨리 숙소라도 잡아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어찌할 바가 없으니 안개가 가득한 도로에서 다시 차를 돌려 거북이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미리 예약해 두었던 렌트카며 병원스케줄이며 여러 가지를 다 취소하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다시 예약해야 해서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남들은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일인데 나는 벌써 한 달에 한 번 꼴로 겪고 있었다. 이쯤 되니 주변에서는 처음엔 ’날씨요정’으로, 나중엔 ’결항요정’으로 부르고 있다. 진짜 웃픈 일이다. 천재지변을 이렇게 자주 겪을 줄이야. 하지만 지난번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해 발이 묶이면서 옴짝달싹하지 못해 불안해했던 경험 때문일까. 이번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날씨를 내가 뭘 어쩌겠어. 내가 발 동동거린다고 기상 상황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못 뜨던 비행기가 갑자기 뜰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고 며칠 더 가족들이랑 같이 논다 생각하지 뭐’ 마침 같이 있던 가족들도 각자의 스케줄을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던 마음이 좀 잠잠해졌다. 게다가 지난번 일을 겪으면서 내 마음이 불안하든 아니든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상황은 매한가지였었다는 게 기억났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유난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은 이번 여정이지만 한숨 돌리면서 다시 천천히 재정비해보기로 했다. 

 

천재지변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땀이 삐질 나는 상황들이 닥치더라도 어찌할 바가 없는 일들이라면 일단은 숨을 고르고 받아들인 후 천천히 다음 수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번만 해도 비록 기상 사정으로 인해 비행기는 결항되었지만, 집이 있으니 숙소 걱정도 없고, 덕분에 단체로 독한 감기로 고생하던 조카와 가족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면서 스트레스 안 받아도 되고, 며칠 여기서 더 쉬면서 상태가 호전되어 돌아갈 수 있으니 좋은 점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잠시 내려놓고 기다려보자. 다르게 바라보면 어떤 방도가 생각날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별일 아니라 느껴질지도 모른다. ‘발 동동 땀 삐질’은 결국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을 바꾸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마음은 내 것이니 마음을 돌리는 것은 나만 할 수 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돌려 지금이 무사히 잘 지나갈 거라 믿으며,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을 돌리니 기분이 나아졌고, 기분이 나아지니 괜찮은 하루가 되었다. 날씨 괴물도 아니고 날씨요정이라는데, 이까짓 거 뭐. 별일 아니다.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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