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을 심하게 앓았다. 처음엔 코로나에 재감염되어, 그다음엔 대장에 생긴 선종을 떼어내느라, 그리고 곧이어 헬리코박터 제균치료를 받는다고 한 달을 온몸에 항생제를 쏟아부었다. 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동안 젊음을 믿고 몸을 막 쓴 대가인지 내 몸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약 때문인지 한 달 동안 기운이 너무 없어 운동은 고사하고 잠시 산책하는 것도 큰맘 먹고 해야 할 정도로 기력이 달렸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니 자연스레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내가 침대인지 침대가 나인지 모르겠는 시간이 계속되니 눈을 뜨고 깨어있는 시간이 너무 무료했다. 자꾸 잡생각이 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통증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 그래서 뭐라도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세미를 떴고, 목덜미와 손가락이 버티기 힘들어지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게 힘들어졌을 땐 요즘 MZ사이에 폴더폰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예전 폰이나 써볼까하고 유물같은 핸드폰을 찾아 충전했고(하지만 실패했다.) 이마저 지루해질 때쯤은 강아지랑 대화했다. 그렇게 소소한 일들을 찾다 찾다 더는 할게 없어졌을 때쯤 그동안 정리하지 못해 엉망이 된 집을 조금씩 정리했다. (정리라는 말보다는 그냥 서랍 한칸 한칸 다 열어보면서 뭐가 있나 확인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그렇게 하나씩 서랍 속에 처박혀있던 기억도 나지 않는 물건들을 뒤적이다가 제일 아래에 있는 서랍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백 하나를 발견했다. 언제 샀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 원래는 수영복이 들어있어야 하는 하얀 비닐백. 꺼내보니 꽤 두툼하고 무거웠다. 뭐지? 수영복이 아닌데? 언제부터 여기 들어있었던 거지? 정말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끈을 잡아당겨 조심스레 열어보니 거기엔 액자 하나와 편지, 오래되어 바랜 비행기티켓, 각종 공연 팸플릿들이 높이가 5cm쯤은 족히 넘게 들어있었다. ‘아….’ 가장자리가 모래로 장식된 액자를 뒤집는 순간 기억이 났다. 그때의 기억들이구나. 무려 15년도 더 된 날들의 기억. 그때 오고 갔을 마음이 궁금해졌다. 자리를 잡고 앉아 그때 들었던 노래를 틀어놓고는 수북이 쌓인 편지와 유품 같은 팸플릿들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때는 바야흐로 2005년. 아직은 대학원생이었던 내가 다 큰 어른인 줄 알았던 그때, 한 남자를 만났었다. 첫사랑을 아프게 정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가오는지도 모르게 다가왔던 같은 학교의 오빠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대학원을 마칠 때쯤 사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늘 찾은 유물은 그때 받았던 편지들인데, 그 오빠는 그림을 잘 그리고, 편지나 카드 같은 걸 자주 적어주던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편지 같은 걸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내용은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이없게 헤어졌던 마지막의 기억, 고속도로에서 크게 싸워서 울었던 기억, 시시껄렁한 일에도 깔깔 웃던 기억같은 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데, 내가 받았던 편지에 어떤 글이 적혀있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더라. 궁금한 마음에 한 장씩 그때 받았던 편지들을 읽어 내려갔다.
첫 번째 편지에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한 남자의 설레는 사랑 고백 같은 게 적혀있었고, 29일, 30일, 99일, 100일같은 날들엔 그 날에 느꼈던 감정과 일상이 적혀있었다. 특별한 날도 있었고 평범한 날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편지에 똑같이 적혀있던 단어가 있었다. “사랑하는”, “태어나줘서 고마워” “행복하자” 였다.
편지 한 장에도 사랑한다는 말은 수없이 많이 반복되어 있었고,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고맙다는 말도 적혀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콕 했던 말은 “나는 신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너를 만나게 해준 신께 감사한다. ‘라는 글귀였다. 쌓여있던 편지를 다 읽고 나니, 그때의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막상 그때는 많이 싸우고 울고 투정 부리고 했던 것 같은데. 어렸던 나는 그 사랑을 어떻게 다 받아야 하는지 잘 몰랐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속에 오빠의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편지가 한 장 섞여 있었다. A4지를 가득 메우는 예쁜 손글씨. 오빠를 행복하게 해줘서 너무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이 적힌 편지. 몇 가지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고 나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에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지만, 많이 어리고 이기적이었을 그때의 내 모습이 생각이 나서.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 한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아가고 있을 테니 직접 말을 전할수는 없을 테지만, 그때의 그 사람을 만난다면 그땐 정말 미안했고, 아주 많이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빈 공간에 대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 오빠한테는 크게 배운 게 두 가지 있다. 시간이 이렇게나 오래지나도 잊히지 않는 말을 해준 장본인이다. 하나는 ”사라야, 다른건 틀린게 아니야. 다른건 그냥 다른거지“ 라는 말이었고, 또 하나는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는 말은 그때의 나로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문장이었기에 엄청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말은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로도 사람들을 대하면서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떠올랐던 말이니까.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사랑을 말로 꺼내어 표현하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당연하게 상대가 알겠거니 생각해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과 말로 꺼내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그때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오늘 읽은 편지와 떠오른 기억을 보니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오빠가 그 당시에는 나보다는 훨씬 큰 어른이었나보다 싶다.
지금의 나는 좀 나아졌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지금은 사랑의 휴지기지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면 그때는 지금의 이 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사랑 그 자체의 감정 말고, 정말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사랑할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뜨겁게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고, “사랑해“, ”고마워“, ”행복해“ 같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만 쉽게 꺼내지 않는 말들을 아주 많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히 발견한 선물 같은 추억이 감사한 하루다.
오늘의 선곡은 오래된 옛날 노래. 레트로라고 해두자. 바이브의 ’Promise U’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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