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배의 바다이야기] 배앓이 약 정로환(‘征’露丸) vs 정로환(‘正’露丸)

윤학배 | 기사입력 2023/08/30 [08:56]

[윤학배의 바다이야기] 배앓이 약 정로환(‘征’露丸) vs 정로환(‘正’露丸)

윤학배 | 입력 : 2023/08/30 [08:56]

1904~1905년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한반도 주변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이 다. 러일전쟁은 유럽의 강국 러시아와 아시아의 신흥 강자 일본간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한반도와 극동의 권리를 두고 벌어진 전쟁이다. 그런데 이 전쟁은 러시아가 우세하리라던 당초의 예상과 다르게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 일본의 정로환(좌), 한국 동성제약의 정로환

 

러시아를 이기자, 정로환(征露丸) 

 

‘정로환’이라는 토끼똥을 닮은 검은 알갱이 약에 얽힌 추억을 한두 개쯤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어릴 적 배 아플 때 한 번씩은 먹었던 약이다. 제법 역사가 오래된 약으로, 작고 검은 알갱이에 냄새는 별로인 약이다. 물론 지금도 제조되고 있고 인기도 제법 있다. 요즘은 겉에 단것을 씌운 당의정 정로환이 있어서 맛도 괜찮고 먹을 만 하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배앓이 특효약 정로환은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서양이나 동양이나 바다 선상 생활의 큰 문제는 바로 먹는 물이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먹는 물과 음식의 보관이 가장 큰 문제여서 장시간 선상 생활을 하는 수병들은 배앓이를 달고 살았던 것이다. 비단 이것은 일본 수병만의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나 다른 나라 수병들도 마찬가지여서 공통의 고질이었다. 유럽에서는 대안으로 신선한 물 대신 선원들에게 와인이나 맥주를 배급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럼주를 물에 타서 만든 술 그로그grog를 마시게 했다. 그런데 이 약한 그로그를 마시고도 약간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바로 복싱경기에서 강펀치를 맞고 비틀 거리는 것과 아주 흡사하기에 ‘그로기 상태’라는 말이 나왔다. 물론 독한 술과 물이 섞이니 어느 정도 소독 효과는 있어서 배앓이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러일전쟁 직전 1902~1903년경 일본의 해군 수병들도 오랜 선상 생활로 복통과 배앓이에 시달리곤 했다. 이때 바로 이 복통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신약 중의 신약이 정로환이었다. 이 배앓이 신약인 정로환 덕분에 일본 수병들은 고질이던  복통이 사라지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의 정로환 약병을 보면 그 한자 이름에 고개가 갸웃해진다. ‘정로환’이라는 약 이름의 한자가 지금과는 다른 '征'露丸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정복한다는 의미에서 정복할 정征 자를 사용했다. 러시아가 한자 발음으로는 로서아露西亞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된다. 당시에 얼마나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기 위해 준비하고 다짐했으면, 일본 해군 수병들이 먹던 배앓이 약 이름이 러시아를 정복하자는 의미의 정로환이었을까. 일본이 당시 상대도 되지 못할 것이라던 예상을 뒤엎고 세계 최강 함대의 하나로 평가되던 러시아 발트함대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러한 철저한 준비와 정신 무장 아니었을까. 물론 일본이 1902년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계속 견제하던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해, 당시 세계 최강의 해양 대국이던 영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미리 확보해둔 것이 승리에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말이다.

 

러일전쟁 당시 영국은 일본과의 영일동맹에 따라 러시아 발트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방해했다. 이는 러시아 함정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아오도록 해, 러시아 해군이 대한해협 근처에 도착할 때는 장거리 항해로 지쳐서 거의 기진맥진할 지경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 당시의 해군 함정들은 석탄을 연료로 하는 증기 엔진 선박이었다. 북유럽 발트해에서 아시아로 오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지역 등의 중간 기항지에 들러 양질의 석탄 공급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이 이를 방해함으로써 러시아 함정들의 빠른 항해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렇듯 영국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덕에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일본이 전쟁 준비를 매우 치밀하고 철저하게 한 것이 승리의 원동력인 건 사실이다. 배앓이 약 정로환이 이러한 일본의 치밀함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이후 이 신약 정로환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한자 이름이 바뀌어 지금과 같은 ‘正’露丸이 되었다. 물론 이제는 일본의 정로환도 한자를 우리와 같은 이름으로 변경해 사용하고 있다. 바다로부터 나온 배앓이 약 정로환이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갈 일이 우리 바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윤학배

1961년 북한강 지류인 소양강 댐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강원도 춘성군 동면의 산비탈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붓당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춘천 근교로 이사를 한 후 춘천고를 나와 한양대(행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986년 당시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바다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부의 부처개편에 따라 해양수산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다시 해양수산부에서 근무를 하였다. 2013년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2015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해양수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여의 바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공직 기간중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UN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와 영국 런던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6년여를 근무하는 기회를 통해 서양의 문화, 특히 유럽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애정, 열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호모 씨피엔스 Homo Seapien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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