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관심이 가져온 큰 발견, 김 양식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또 즐겨 먹는 해산물중 하나가 김일 것이다. 비린내 난다고 생선을 싫어하는 어린 아이들도 김은 오히려 좋아한다. 반찬이 없을 때 김 두어 장이면 김밥이 뚝딱 만들어 지고 조미김 한통이면 한 끼는 쉽게 때울 수 있기에 김은 우리 어머니들의 고민을 덜어주는 효자이기도 하다.
김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식이 된 수산물이기도 하다. 김은 한자로는 해태(海苔)라 불리는데 바다의 풀 또는 잡초라는 뜻의 영어 see weed와 비슷한 의미이다. 이런 김은 다시마등 유사한 해조류와 마찬가지로 여름철에 바다온도가 올라가면 다 녹아서 크지 못하기 때문에 차가운 겨울철이 제철이다.
그런데 김은 왜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한 글자인 김일까? 대부분의 수산물 이름이 두세 글자인데 말이다. 조선 중기 ‘김여익’이란 사람은 병자호란당시 의병장이었는데 인조임금이 오랑캐의 나라 청에 항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도 나고 상심이 커서 1640년경 전남 광양 앞바다 태인도라는 섬으로 낙향해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 해변가에 버려진 나무에 붙어서 자라는 김을 보고 나뭇가지를 모아 묶어서 김양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그 고장 사람들이 김여익이 하던 방식을 따라서 김을 본격적으로 양식하게 되었고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김여익이 처음으로 키운 해조류라 하여 김씨 성을 따라 ‘김’이라 불렀다 한다. 그것이 지금의 김의 시작이다.
우리 선조중의 한분이 김을 양식하기 시작 했다면 ‘김’이 아니라 ‘윤’이라고 지금 부를 지도 모를 일이다. 타임머신이 있어서 조선시대로 간다면 선조들에게 김을 양식하라고 부탁드리면 될 듯하다. ‘김밥집’ 아닌 ‘윤밥집’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김 한 장으로 1조원 수출이라니
그런데 외국에서는 김을 검은 종이라는 의미에서 black paper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서양에서 검다는 의미는 죽음이나 불길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식용으로서 별로 좋아 하지 않았다. 서양의 상가에서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이 그 의미이다. 과거 2차 대전당시 일본인들이 미군이나 유럽 군인 포로들을 수용하면서 일부 해안지역에서 김을 채취하여 급식으로 주었는데 전후에 전범재판이 열리는 과정에서 이것이 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로 문제제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검은 종이 같은 것을 음식으로 주는 것을 보고 불에 탄 종이를 포로들에게 먹이는 것으로 오해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맛있고 영양가 높은 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이 서양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아쉽게도 일본으로 부터이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김은 일본식 이름인 ‘노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의 김이 일본 김보다 훨씬 품질도 좋고 맛도 좋기에 서양에서 우리나라의 김이 점차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이제 서양인들도 건강식품이자 간식으로서 김에 대한 효능과 맛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연간 김 수출은 약 1조원에 달할 정도여서 수산물은 물론이고 농식품중에 단연코 수출 1위를 달리고 있다.
대표 농식품인 김치나 홍삼 등의 수출액은 김에 한참 못 미친다. 더욱이 김 스낵이나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향과 맛을 가미한 조미김 등 다양한 제품이 개발되면서 미국, 유럽에서 새로운 건강식품으로 더욱 각광받게 될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김은 우리와 같은 밥반찬이 아닌 간식거리로 인식되기에 이러한 흐름에 잘 대응한다면 또 하나의 ‘K-Seafood’ 성공 스토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세계인들이 우리나라 김을 먹는 그날 까지 김양식 어가와 어민들의 건투와 빈다. 김씨에게서 나온 김은 금(金)이다.
윤학배 1961년 북한강 지류인 소양강 댐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강원도 춘성군 동면의 산비탈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붓당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춘천 근교로 이사를 한 후 춘천고를 나와 한양대(행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986년 당시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바다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부의 부처개편에 따라 해양수산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다시 해양수산부에서 근무를 하였다. 2013년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2015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해양수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여의 바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공직 기간중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UN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와 영국 런던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6년여를 근무하는 기회를 통해 서양의 문화, 특히 유럽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애정, 열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호모 씨피엔스 Homo Seapiens”가 있다.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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