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면적의 71%가 바다
우리가 사는 이 귀한 행성(行星)을 우리는 지구(地球)라고 부른다. 지구라는 이름은 한자나 영어(The Earth)나 모두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인류의 생활과 삶이 육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인류의 전쟁도 결국 ‘땅 뺏고 땅 지키기’ 경쟁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시각을 달리 해 보면 과연 꼭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달걀’은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작은 시각이나 발상의 차이가 결과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 행성을 늘 보아 오던 육지가 아닌 바다의 시각에서 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산에 갈 때 가끔 같은 등산길과 하산길 임에도 내려오면서 내가 이 길로 올라갔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시인 고은 선생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라는 시 아닌가 한다.
어쩌다 한 번 씩 가보는 바다를 우리는 항상 육지에서 본다. 그런데 한번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육지와 해안을 본적이 있는가! 아니 굳이 배가 아니더라도 잠시 해안가 백사장에 가서 모래에 발을 담그고 뒤돌아 본적이 있는가. 그렇게 보는 육지와 해안은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해안이다. 거기에는 아마도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수많은 ‘그 꽃’들이 보일 것이다.
이렇듯 조그만 시각의 차이는 참으로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러면 우리 바다는 얼마나 깊고 크고 넓은가? 상상을 뛰어 넘는다가 답이다. 바다는 지구의 71%를 차지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이곳 행성을 지구(地球)가 아닌 수구(水球)라 불러야 함이 타당하다고 말하고 싶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푸른 별로 보이기에 지구를 푸른 행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바다 때문이다.
따라서 수구라는 말은 매우 일리 있고 타당하고 당연하다. 지구에 극지가 4개가 있다고 한다. 남극과 북극, 지구 최고봉 에베레스트, 그리고 바다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海溝)를 말한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바다의 외형적인 모습 때문에 지구를 수구라고 하지는 않는다. 인류를 포함한 우리 행성의 생명체가 바다에서 나왔고 우리 기후를 결정하는 변수의 60%가 바다에 있으며 지구 산소의 75%를 공급하고 먹거리를 내어주는 곳이 바로 바다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육지와 바다를 합하면 수심 3,000미터 바다만
지구 육지의 평균고도가 해발 800미터 정도인데 비해 바다의 평균 수심은 3,850미터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육지와 바다를 모두 평평하게 만들면 지구 육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3천미터 이상의 수심을 가진 바다밖에 남지 않게 된다. 지구에서 육지는 흔적도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바다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실감이 된다. 육지의 가장 높은 곳은 에베레스트 산으로 해발 8,848m인데 그곳에는 1953년 영국등반대의 뉴질랜드 산악인 힐러리(Hillary) 경이 등정한 이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두 발로 정복을 하고 자기들의 국기를 남겼다. 물론 태극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사실 바다는 아직 가장 깊은 곳이 어디인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까지는 필리핀 남쪽 태평양에 위치한 마리아나 해구(Mariana Trench)에 있는 비티아즈 해연(海淵, Vityaz deep)이 11,034 미터로 가장 깊은 곳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누가 알겠는가 어디 더 깊은 곳이 있을지?
마리아나 해구는 필리핀 남쪽에서 남태평양 쪽으로 2,600키로 길이로 형성되어 있는 깊은 바다의 골짜기로 이 골짜기의 평균수심이 8,000미터이다. 즉 에베레스트 산을 그대로 집어넣을 만한 깊이의 바다가 2,600키로나 이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바다에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바다산맥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호수도 있다. 그래서 육지와 바다를 섞어서 평평하게 만들면 지구에는 육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3천미터 깊이의 바다만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 행성의 마지막 프론티어 바다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은 우주에 대한 정보나 데이터는 공유하면서도 오히려 지구에 있는 바다에 있는 정보나 데이터는 공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더 민감하고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인류는 달을 가고 화성을 가고 그 바깥에 있는 행성들도 방문하는 우주선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에 있는 바다 밑의 해저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미지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다의 깊이를 아직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다 밑을 탐험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악조건이다. 특히 가장 어려운 것이 수압이다. 통상 바다 깊이가 10미터 깊어지면 1기압 즉 1kg의 수압을 증가된다고 한다. 그래서 맨몸으로는 고작 수십 미터 잠수하기도 벅찬 것이다. 바다 속 1만 키로 깊이면 1000kg의 수압이 가해진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얼마나 엄청난 장비가 필요한지 상상이 될 것이다. 우주로 가는 것 못지않은 첨단과학과 소재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다를 역설적으로 지구상 마지막 남은 신대륙이자 프론티어(frontier) 라고 한다.
우리의 미래인 바다는 바다 인류인 우리들 호모 씨피엔스(Homo Seapiens)들이 바다로 눈을 돌려서 보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들처럼!
윤학배 1961년 북한강 지류인 소양강 댐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강원도 춘성군 동면의 산비탈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붓당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춘천 근교로 이사를 한 후 춘천고를 나와 한양대(행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986년 당시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바다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부의 부처개편에 따라 해양수산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다시 해양수산부에서 근무를 하였다. 2013년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2015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해양수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여의 바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공직 기간중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UN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와 영국 런던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6년여를 근무하는 기회를 통해 서양의 문화, 특히 유럽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애정, 열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호모 씨피엔스 Homo Seapien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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