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반도체‧배터리‧전기차 등 미래 첨단산업 분야에서의 한일 협력 강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해제하기로 하면서 업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 삼성전자에서는 일본 내에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던 연구시설을 ‘DSRJ(반도체연구소재팬)’란 이름으로 통합해 운영한다는 방침을 내놓고, 300조원을 투자해 국내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키로 하는 등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에 발빠르게 호응하고 있다.
문제는 이미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진행되던 상황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해제는 그다지 득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업체 입장에서는 없는것 보다 있는게 낫겠지만, 한일관계 쟁점 중 하나인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완전히 패배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득에 비해 실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요코하마‧오사카 등 일본 내에 흩어져 있던 연구시설을 ‘DSRJ(반도체연구소재팬)’란 이름으로 통합해 운영한다는 취지의 조직개편안을 내놓았다. 덩달아 일본에 있는 우수 R&D 인력을 확보하고 관련 투자도 확대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여기에 더해 삼성은 300조원을 투자해 경기도 용인시 반도체 클러스터에 반도체 제조공장 5개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지역균형발전 지원을 위해 전국에 위치한 계열사 사업장을 중심으로 향후 10년간 총 60조1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이같은 움직임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반도체 부문 활성화에 힘을 쏟자, 기업이 이에 호응하는 차원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일본 방문을 앞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까지 경제사절단에 동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러한 해석에 힘을 보탰다.
실제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결과물로 일본은 반도체 핵심소재 3개 품목(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의 수출규제를 해제키로 했고, 수출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 조치에 대해서도 원상회복을 논의해가기로 했다. 즉각 반도체 관련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중에서도 삼성전자가 혜택을 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정작 반도체 업계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방일로 나온 결과물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놓으면서도 이번 수출규제 해제가 반드시 드라마틱한 결과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 측 관계자는 “과거 일본이 2019년 3개 품목수출규제에 나서면서 기업들이 ‘공급망 다변화’에 나섰고 일본 의존도를 줄여나갔다. 물론 초고순도 불화수소 등의 경우 품질면에서 여전히 일본산의 우수성을 대체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규제가 우리 기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3개 품목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해제 조치와 관련해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서류제출이 간소화됐다는 점에서 좀 편해졌다고는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일본이 수출규제를 해제하더라도 언제든지 외교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업체들은 결국 공급망 다변화나 소재 국산화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보면, 일본의 반도체 소재 3품목 수출규제로 피해를 본 쪽은 우리 기업이 아닌 일본 기업들이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참모들의 필독서로 주목받은 책 ‘반도체 삼국지’에서도 일본 반도체 업계가 자신들의 기술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 그리고 시장변화에 둔감해 혁신을 등한시한 면모들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번 방일을 통해 3개 품목 수출규제 해제라는 주요성과를 거뒀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업계에서는 그 효과가 크지는 않다고 보는 모양새다.
특히 야권 일각에서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굳이 윤석열 정부가 수출규제 해제로 일본 측에 숨통을 틔워줄 이유가 있었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업계에서는 여전히 일본의 소부장 기술력이 우수한 수준인 만큼 ‘공급망 다변화’ 측면에서 환영할만한 결과물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미중 간 패권싸움이 본격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고려한다면, 한일 간 반도체 부문에서의 협력이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이 오는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하는 일정을 앞두고 있는 만큼, 일본과의 이번 경제협력을 카드 삼아 미국 반도체법 관련 협상에서 적극적 협상력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미국 반도체법에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서 대응할 수 있을까’를 묻는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살아보니까 친구는 많을수록 좋고, 적은 적을수록 좋다”고 말한 바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이를 감안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대통령실은 이번 방일 성과에 대해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고 자평하지만, 또 하나의 쟁점인 ‘과거사 문제’에 한해서는 완전히 패배한 모습을 보여줬다.
경제 부문에서의 소통채널은 복구했지만 강제징용 배상 해법에 대해서는 일본 측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위안부 합의 이행과 후쿠시마 수산물 규제철폐 등 껄끄러운 요구사항만 잔뜩 떠안고 돌아왔다. 이번 만남 이후, 우리나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측에 사과를 요구할 명분은 완전히 사라졌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컵에 물이 절반 이상 찼다’는 비유를 내놓으며 어떻게 한번에 다 채워지겠느냐고 말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반 밖에 안찼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문화저널21 박영주 기자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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