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칼럼]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

김종철 | 기사입력 2022/09/26 [09:14]

[김종철 칼럼]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

김종철 | 입력 : 2022/09/26 [09:14]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진행된 상륙작전이다. 여기에는 연합군 함정 261척, 한·미 해병대를 포함하여 병력 75,000명이 참여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그리고 악마의 신을 이긴 완벽한 세계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과연 남침의 원흉 김일성과 그 일당들이 과연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다. 답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알고는 있었지만 낙동강 전선을 넘어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안보 그리고 전쟁에서는 자만심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토를 겨우 5%를 남겨두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맥아더 장군의 상륙작전의 기획, 계획과 성공에 대한 확신, 연합군의 각종 함포지원과 공중폭격, 그리고 한·미 해병대의 상륙돌격 등이 있겠지만 필자는 인천상륙작전 이전 대한민국 해군 주도로 이루어진 3개의 작전에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이희정 중령(예비역 해군소장)의 도서 탄환작전, 이성호 중령(제 5대 해군 참모총장 역임)의 기뢰 이송 선박 제거작전, 함명수 소령(제 7대 해군 참모총장 역임)과 첩보부대원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작전의 최종 계획하고 실행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이신 손원일 제독(해군 창설 주역, 제 1대 해군 참모총장과 제 5대 국방부 장관 역임)이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당시 해군 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은 인천 근해 도서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막고 지형정찰과 정보 수집을 위한 거점 확보를 위해 8월 16일 해본 작명갑 제93호를 시달하여  총 8척(701·702(F)·704함·503·302·307·361·313정)의 함정으로 함대를 편성하고 각 함정의 승조원으로 육전대를 구성, 도서 탄환작전을 수행도록 하였다. 도서 탄환 작전은 PC-702함의 지휘관(함장)인 이희정 중령의 성을  따서 ‘Lee 작전’이라고 했다.

 

육전대는 8월 16일 문갑도, 8월 18일 덕적도, 8월 20일 이작도, 8월 21일 영흥도를 순차적으로 수복하여 도서지역 주민에게 자유를 안겨 주었다.  

 

‘Lee 작전’이 시작될 무렵 또 하나의 작전인 ‘X-Ray 작전’이 시작 되었다. 손원일 제독은 8월 12일 미극동군사령부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듣고 8월 13일 해본 정보국장인 함명수 소령(당시 중령 예정)에게 첩보부대를 구성하여 정보수집활동을 명령하였다. 이후 함명수 소령은 김순기 중위(해군 창군 멤버), 장정택 소위(해군 OCS 9기), 임병래 소위(해군 OCS 9기)에게 4~5명으로 구성된 각각 첩보팀을 구성하도록 지시하여 3개 팀 17명이 구성되었다. 손원일 제독은 사지(死地)로 떠나는 첩보대원들에게 ‘제군들 여러분의 어깨에 조국의 운명 달려있다’며 마지막 경례를 받고 악수를 하면서 부하를 사지로 보내는 지휘관으로서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 

 

8월 18일 새벽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생명보다 조국을 위해 반드시 성공 하겠다는 다짐으로 부산항을 떠났다. 영흥도 근해에 도착 했을 때 비로소 함명수 소령은 상륙지역, 작전목표, 활동지역, 정보수집, 각 팀의 임무 등에 대해 지시하였다. 8월 24일 새벽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상륙한 후 즉시 영흥국민학교(현 영흥초등학교)에 거점을 확보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Lee 작전>의 육전대로부터 영흥도를 인수받았다. 첩보대원들은 인천 경기 지역을 오가며 북괴군의 해안방어 시설, 북괴군 규모, 북괴군 무장 상태, 북괴군 만행 등을 파악하고 수집된 정보는 해본을 경유 미 극동군사령부에 보고되었다.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 준비가 끝난 미극동군 사령부는 첩보대원들의 퇴출 명령으로 철수 준비 및 순차적으로 철수 하고 있을 때 인근도서를 통해 북괴군 1개 대대가 기습하였다. 임병래 소위 등 7명의 첩보대원과 청년의용대 30여명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북괴군을 맞아 치열하게  끝까지 전투를 치려고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해군 신병 10기)는 팀원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동료들이 보트를 타는 모습을 보고 북괴군과 교전 하여 수십 명의 적을 사살 하였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끝까지 남아있던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는 포로가 되어 비굴하게 북괴군에게 정보를 넘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서 자결로서 호국영령이 되었다. 

 

기뢰는 상륙작전 시 함정들에 대해 많은 위험을 초래한다. 인천상륙작전 시에도 기뢰에 대한 공포감은 있었다. 그러나 공포감을 없애 준 사건이 있었다. 1950년 9월 10일 PC-703함장 이성호 중령은 해주 근해에서부터 추적하여 인천 북서방에서 괴선박에게 정선을 명령 하였으나 도주로 인해 함포 사격으로 격침하고 부유물 등을 확인한 결과 기뢰부설 선박이었다. 

 

이것이 보고되어 상륙작전 지휘부는 회의를 통해 ‘X-Ray’ 작전팀의 정보 수집 결과 인천항 수로에는 기뢰가 부설 되지 않았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함정들이 인천항을 자유로이 출입항 할 수 있었다. 만약 기뢰가 인천항로에 부설 되었으면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성호 중령과 PC-703함의 승조원의 활약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악마인 북괴군에 맞서 싸우다가 산화(散華)하여 호국영령이 되신 ‘Lee 작전’의 영웅 박동진 일등병조, 이삼재 이등병조, 김재경 삼등병조, 홍희표 삼등병조, 탁형각 삼등병조, 김용주 삼등병조, ‘X-ray 작전’의 영웅 임병래 중위, 홍시욱 삼등병조 그리고 영흥도 청년의용대 대원으로 애국충정의 마음으로 적과 싸우고 하나 뿐인 생명을 조국에 받치시고 전사한 강태원, 강대원, 박준석, 김상식, 김성옥, 노재후 등 14분의 호국영령을 결코 잊으면 안 될 것이다.

 

 Lee 작전 · X-ray 작전 · 기뢰선박 제거 작전은 의미는 △ 인천항 출입항로의 안전 확보 △적 정보 획득 △ 대규모 작전에 대한 주민 안정화 △ 작전 후 반격 및 후방 사전 차단 △ 도서 주민과 해군장병간의 화합 △ 해군장병의 국가를 위한 희생정신 등으로 할 수 있다.

 

끝으로 이제 해군의 3개의 작전을 기초로 이루어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일인 9월 15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 한반도가 완전히 지구상에서 공산화 되고 패망하기 일보 직전에 대한민국을 구한 작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흔들릴 때 국민과 국군이 일치단결하여 적을 격퇴하였기 때문이다.   

 

김종철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예비역 연구위원

해군 OCS장교 중앙회 대외협력국장

 

※외부 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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