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계석칼럼] 내가 주인이 되는 콘도형 소공간 활용은 어떨까?

공간의 창의적 해석과 동영상으로 뉴노멀(New Normal)을

탁계석 | 기사입력 2020/12/10 [10:05]

[탁계석칼럼] 내가 주인이 되는 콘도형 소공간 활용은 어떨까?

공간의 창의적 해석과 동영상으로 뉴노멀(New Normal)을

탁계석 | 입력 : 2020/12/10 [10:05]

한 작가(作家)와 만나기로 했다. 어디서 만날까요? 코로나 2.5로 커피숍에 조차 들어갈 수 없다. 서로 멍하니,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상대는 자동차를 가졌으니 지하철에서 만날 수도 없다. 주차가 좋은 예술의전당 입구 로비에서 만나자 했다. 테라로사에서 커피를 뽑아 로비에서 이야기 하려는데, 여기서 마시면 안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미술관 앞 야외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대화를 나눴다. 

 

순간 샤르트르의 소설 '벽'이 생각났다. 전쟁의 폐허에서 사랑을 나눌 청춘에게 벽이 쳐진 공간은 얼마나 중요한가. 공간은 방이고 집이고 존재다. 예술가 역시  공간은 존재의 이유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음향이 좋은 큰 극장, 브랜드가 좋은 극장을 누구나 선호한다. 그래서 극장은 오랫동안 그 지위로 예술가에게 군림하며 갑(甲)의 위치를 누렸다. 대관업, 방장사라는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대관업은 호황을 누렸다. 그런데 무소불위의 권력에 균열이 왔다. 잦은 공연 취소로 콘서트홀 사용에 비상이 걸렸다. 스폰서 따고 자신의 통장을 털어 공연하는 행위들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까? 근본적인 물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공간은 크기가 아니라 콘텐츠와 영상 담기 

 

곳곳에 100석 미만의 공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네트워크와 기획 콘텐츠를 갖추지 않고 시설 투자만한 공간은 적자(赤字)로 허덕이다 코로나까지 맞았다. 보다 나은 공간이란 무엇일까? 크기가 아니라 내용이다. 창조와 실험, 기획, 영상 작업이 가능한 공간이다. 이게 오늘 우리의 방향성인데 자유롭게 쓸 공간이 갖고 싶다. 그렇다고 사업가가 아닌 필자가 무슨 돈으로 공간을 확보한단 말인가?  

 

  고려대학교 근처의 CREATORS SPACE 


궁여지책으로 머리를 짜고 해서 나온 것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 셀프 사용하는 콘도형 소극장 운영이다. 그러니까 일정액을  회원비로 내고 공간을 활용하며 상호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노하우다. 이를테면 회원이 되고, 사용비를 저렴하게 하면서 홍보력은 높이고 영상은 옵션으로 선택해 활용하는 방안이다. 이처럼 요건이 충족하여 공간을 만든다면 투자 모험 없이 공간 사용의 극대화가 이뤄지지 않겠는가. 사용자가 갑(甲)이 되어 예술가 스스로가 실존력(實存力)을 이어갈 수 있다. Ai 시대에 낡은 권위주의는 속도와 기회를 갉아 먹는다. 가보지 않은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사람들에게 고정관념은 상상력과 추진력을 제한(制限)하는 브레이크다. ‘멈추면 비로서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멈추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운동선수와 연주와 창작이다. 

 

공간의 실용적 가치가 확산되는 패러다임 전환기  

 

적어도 지금의 위기 앞에선 화려한 공간을 꿈꾸지 마시라. 나의 꿈이 식지 않을 둥지만 있으면 된다. 큰 공간대신 그 비용을 분할해 쉬지 않고 많은 레퍼토리를 만들고 영상에 옮기는 패러다임의 전환기다. 비대면 동영상 시대가 오고 적어도 그 이전으로 완전히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미래학자들은 말한다. 길거리에 전화통이 사라지면서 처음엔 불편을 겪었지만 핸드폰이 왔고, 재택근무가 답답하다며 강가나 조용한 바닷가에서 근무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뉴욕의 한 슬럼가에 있는 허름한 공간이 비평가와 최고의 춤꾼들이 모이는데 그곳은 창조 1번지의 예술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렇다. 거품을 빼고 어디서 공연했다는 프로필 자랑꺼리 시대는 분명히 지났다.무엇보다 생존과 실존이 중요하다. 나의 몸을 녹이고 나의 예술혼이 발을 뻗을 수 있다면 좋다. 그 옛날 어렸을 적에, 부모 형제가 한 이불을 쓰고 서로 당기며 단칸방에서 살던 겨울밤이 떠오른다. 개울가에 구멍이 숭숭난 화장실을 가는데, 휘영청 달이 밝았다. 하얀 살얼음 사이로 개울물이 잠들지 않고 흘렀다. 그 땐 오늘처럼 살벌하지 않았고 낭만이 있었고 정이 넘쳤다. 

 

물질이 풍성하다고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오늘의 고통이 꼭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회복 탄력성’을 높이고, 도약할 수 있는 ‘비전 근육’을 키워야 한다. 익숙한 것을 과감하게 털고 크레이티브가 살아야 사는 세상이 오고 있다. 

 

탁계석 한국예술비평가회장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화보] 3.1절 맞아 정부차원 한복문화 알린다
광고
광고